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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이 밝았다. 1988년 겨울, 하필 그 해부터 가고자 하는 대학에 먼저 지원을 하고 나중에 시험을 보는, 先지원 後시험으로 대입제도가 바뀐 것도 모자라 바로 1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극악무도한 난이도를 보인 수학 때문에 난 학력고사를 망치다시피 했고 당연히 대학에 떨어졌다. 물론 나의 대입 실패의 1등 공신은 <서울 올림픽이었지만. 재수를 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수험기간 동안 나를 기다려줬던 1년 선배 여친은 예상했던 대로 나에게 이별을 통보슬롯 꽁 머니. 이런 순간이 곧 오리라고 예상을 했던 까닭에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나였기에 그 순간엔 비교적 담담할 수 있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울감은 깊어만 갔다.

1980년대 대학 합격자 발표날 풍경. 당시에는 대학 교정에 합격자의 명단을 붙여 놓았고 수험생들은 합격 여부를 직접 확인해야 슬롯 꽁 머니.1980년대 대학 합격자 발표날 풍경. 당시에는 대학 교정에 합격자의 명단을 붙여 놓았고 수험생들은 합격 여부를 직접 확인해야 슬롯 꽁 머니.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지옥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재수생활은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학원이 개강하고 반편성이 되자 삼수생들 중심으로 호프집에서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게다가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남녀합반을 경험하는 것이었기에 더욱 설렜다. 충정로에 있는 학원의 이름이 왜 ‘종로학원’인지, 학원 바로 옆 서소문 공원에 있는 윤관 장군 동상과 세 번 눈이 마주치면 삼수를 한다는 전설, 또 수험생활과 연애생활을 어떻게 균형 있게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삼수생 형들에게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고 형들을 따라 난생처음 나이트클럽에도 갔다. 성인의 수험생활은 고3 때와는 달랐다. 마음껏 술도 먹었고 당구장에도 출입슬롯 꽁 머니. 심지어 이대생들과 미팅도 들어왔다. 믿기 어렵겠지만.

1989년 당시 서소문공원에 세워져 있던 윤관장군 동상. 구 종로슬롯 꽁 머니 2층 매점에서 정면으로 보여 윤관장군의 눈과 세 번 마주치면 삼수를 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1989년 당시 서소문공원에 세워져 있던 윤관장군 동상. 구 종로슬롯 꽁 머니 2층 매점에서 정면으로 보여 윤관장군의 눈과 세 번 마주치면 삼수를 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올해는 반드시 대학에 가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강하게 짓누를수록 나는 일탈을 반복슬롯 꽁 머니. 같은 반 친구들과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이태원이나 강남역에 있던 나이트클럽에 자주 갔었는데 그 때문인지 1989년 여름까지의 음악들은 죄다 댄스곡들만 기억에 남는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처럼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가 재수생들의 마음속을 휘저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누리던 자유의 기쁨은 이내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 안 된다는 중압감으로 되돌아오곤 했고 즉흥적인 일탈로 원초적인 쾌락은 얻었지만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슬롯 꽁 머니.

https://www.youtube.com/watch?v=1joAzG03q7Q

1989년 1월 발매된 이지연의 2집 타이틀곡 전영록 작사.작곡 <슬롯 꽁 머니아 멈추어다오. 청순한 외모에 맑은 목소리를 가진 이지연은 그 시절 젊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해 나이트클럽에서의 최고 인기곡은 바로 영국의 유로 팝 듀오 ‘런던 보이즈’의 <할렘 디자슬롯 꽁 머니(Harlem Desire)였다. ‘런던 보이즈’는 자메이카 출신인 데니스 풀러와 런던 태생인 에뎀 에프라임이 만든 흑백 듀오이다. 둘은 런던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롤러블레이드 댄싱팀의 일원으로 여러 곳을 돌면서 공연을 하다가 마침내 팀을 결성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할렘 디자슬롯 꽁 머니(Harlem Desire)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는데 이 곡의 전주가 나올 때부터 큰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스테이지로 남녀가 쏟아져 나와 ‘디스 이즈 마이 할렘 디자슬롯 꽁 머니(This is my Harlem Desire)' 부분이 나올 때 목이 터져라 ‘떼창’을 부르는 순간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ohWU8j_2iEg

'런던 보이즈'의 대표곡<할렘 디자슬롯 꽁 머니(Harlem Desire). 1989년에는젊은이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를 가도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지독하게 덥던 어느 여름날, 학원에서 공부를 하던 나는 문득 ‘런던 보이즈’의 <할렘 디자슬롯 꽁 머니(Harlem Desire)가 몹시 듣고 싶어졌다. 나이트클럽이 아닌 곳에서 나는 단 한 번도 그 노래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종로학원 바로 건너편 ‘중림 시장’ 옆에 있던 레코드 가게에서 ‘런던 보이즈’의 테이프를 사서 내 보물 1호 ‘마이 마이’에 꽂았다. 술에 취해 몸을 흔들면서 수도 없이 듣고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였지만, 테이프 뒷면의 가사와 함께 듣는 <할렘 디자슬롯 꽁 머니(Harlem Desire)는 전혀 다른 곡이었다.


슬롯 꽁 머니 desire!

Let our children play with toys

no more guns for little boys


This is my 슬롯 꽁 머니 desire!

Just one night of peaceful sleep

And no more fighting in the streets


슬롯 꽁 머니가에서 바라는 건

우리 아이들이 총 대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거야


이게 슬롯 꽁 머니가에서의 내 바람이야

하룻밤이라도 편안슬롯 꽁 머니 잠을 이루고

거리에선 싸움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


<할렘 디자이어(Harlem Desire)는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의 너무나 슬픈 자화상이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보내고 싶은 그들의 평범한 욕망이었다. 나는 이런 평범한 바람조차 이루어지기 힘든 할렘가의 사람들이 어쩌면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그저 대학이라는 간판을 따기 위해 가장 찬란한 시절을 책상머리에 가두어 놓은 재수생과 가장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주 뜬금없는 생각을 슬롯 꽁 머니. 그 뒤부터 나는 이 <할렘 디자이어(Harlem Desire)가 그렇게 흥겹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의 비극을 이때 이미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7년 후, 안타깝게도 이 ‘런던 보이즈’ 두 명의 멤버는 3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난다. 그들이 바랐던 평범한 평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런던 보이즈'의 두 멤버 데니스 풀러(좌)와 에뎀 에프라임(우)이다. 1996년 1월 21일, 자동차 사고로 두 사람 모두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비극을 맞이슬롯 꽁 머니.'런던 보이즈'의 두 멤버 데니스 풀러(좌)와 에뎀 에프라임(우)이다. 1996년 1월 21일, 자동차 사고로 두 사람 모두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비극을 맞이슬롯 꽁 머니.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이 바람이 더 매서워지면 곧 학력고사를 보게 될 것이다. 1년 전, 데뷔 앨범인 <홀로 된다는 것으로 혜성같이 등장했던 변진섭의 2집 <너에게로 또다시가 이 무렵 세상에 나왔다. 타이틀곡이었던 ‘너에게로 또다시’가 나오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쳤고 슬롯 꽁 머니 ‘숙녀에게’, ‘로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등, 이 음반에 수록된 여러 곡들이 변진섭의 맑은 목소리와 어우러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1989년 가을, 그해 최고 인기 앨범이 된 변진섭 2집 <너에게로 또다시1989년 가을, 그해 최고 인기 앨범이 된 변진섭 2집 <너에게로 또다시

그러나, 나를 비롯한 재수생들의 최애곡은 바로 이 음반의 마지막에 수록된 ‘슬롯 꽁 머니’이었다. 노영심이 노랫말과 곡을 쓴 ‘슬롯 꽁 머니’은 자신의 처지는 생각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여자들만 갈구하는 그 시절 젊은 남자들을 풍자하는 아주 유쾌한 곡이었다. 재미있는 노랫말과 경쾌한 멜로디, 개구쟁이 같은 변진섭과 노영심의 순수한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어울렸고 젊은 남녀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청바지가 불티나게 팔렸고 김치볶음밥도 아주 인기 있는 메뉴가 됐다. 재수생들은 ‘슬롯 꽁 머니’을 개사해서 좋은 대학에 합격한 자기 모습을 노래 속에 그려 넣기도 했다. 학력고사 직전까지 ‘슬롯 꽁 머니’을 들으며 공부를 했던 나는 비록 고3 때 지원했던 대학은 아니었지만, 나의 ‘슬롯 꽁 머니’대로 마침내 대학에 합격했다. 이 노래는 나의 행운의 부적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qPGOFHcVfA

변진섭 2집 수록곡 중 나의 최애곡 노영심 작사.작곡 '슬롯 꽁 머니'. 변진섭과 노영심 두 사람은 꼭 빼닮은 귀여운 외모로 노래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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