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생활 두 달 차였던 재작년 일이다. 김치가 너무 먹고 싶은데 로컬 슈퍼마켓에서 슬롯사이트 지니 무를 구할 수 없어 한차례 좌절을 겪고, 같은 회사 주재원 가족 식사 자리에서 알려 주신 한국 야채상에서 슬롯사이트 지니 무를 예약 판매한다는 귀중한 정보를 입수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는 시기라 마지막이라고 했다. 인도 북부의 고랭지에서 수확한 슬롯사이트 지니 무를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김치 한 번 담가본 적 없는 주제에 나는 일단 야심 차게 슬롯사이트 지니 무를 주문했다.
배달 온 슬롯사이트 지니 무를 보니 고춧가루와 액젓으로 버무리면 대충 뭐 어떻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년 차 올드 마담인 지금은 슬롯사이트 지니 무 손질은 메이드에게 시키지만, 뭘 할 줄 알아야 일도 시키는 법. 그때는 아는 게 없으니 직접 슬롯사이트 지니 무를 손질했다.
그런데 손질하다 보니 필요 없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무에 달린 무청은 무보다 훨씬 길고 양이 많았다. 배추는 겉의 초록색 잎을 제법 많이 떼어내야 했다. 지저분한 부분도 있었지만 제대로 된 부분도 있어서 그것들을 버려야 하는 게 아까웠다. 어떻게 구한 배추와 무인데 이걸로 뭘 해 먹을 수 없을까 검색하다가 순간 머리를 꽝 얻어맞은 것 같았다. 무청은 시래기, 배추 초록잎은 슬롯사이트 지니였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때까지 무청이 뭐고 슬롯사이트 지니가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모를 수도 있지, 살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있나 정신승리하면서 시래기와 슬롯사이트 지니 만드는 법을 검색해 봤다. 의외로 아주 쉬웠다. 물 끓여 소금을 넣고 삶기만 하면 되었다. 배추 절이기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그 와중에 욕심내서 무청과 슬롯사이트 지니까지 삶았다. 그리고 식히고 난 뒤 한 번 먹을 양만큼만 랩에 싸서 냉동실에 얼린 뒤 그 존재를 새카맣게 잊고 말았다.



새카맣게 잊고 있던 그들의 존재가 빛을 발하는 때는 바로 여름이다. 인도의 여름은 3월부터 시작된다. 35도가 넘는 한낮의 기온을 견뎌낼 채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모두가 흐물흐물 시들시들하다. 변변한 채소가 없는 이때에 시래기와 슬롯사이트 지니는 여름 채소 상비군이다. 국을 끓여 먹어도 되고 생선을 조릴 때 넣어도 구수하다. 우리 가족은 국을 별로 즐기지 않기 때문에 다른 요리로 해 먹는 편이다. 시래기는 떡볶이에 양배추 대신 넣고, 슬롯사이트 지니는 된장찌개 끓일 때 호박이나 각종 야채 대신 넣으면 더 풍성하고 맛이 좋아진다. 아직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미트가이의 소고기와 함께 슬롯사이트 지니를 넣고 해장국을 끓여도 좋을 것 같다.

시래기와 슬롯사이트 지니의 쓰임새를 발견(?)한 것이 스스로도 기특해 시래기와 슬롯사이트 지니의 역사에 대해 찾아보았다. 농경사회에서 시래기와 슬롯사이트 지니는 채소의 보존과 저장 때문에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나와 같은 이유가 아닌가! 물론 나는 저장과 보존 때문에 만든 것은 아니고 버리기가 아까워서 일단 만들어놓고 저장했지만 말이다. 무와 배추를 수확할 때 미리 만들어 놓은 슬롯사이트 지니와 시래기는 겨울철에 특히 중요한 식재료였다고 한다. 나에게는 여름 채소의 대안이지만, 옛날에는 겨울 채소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계절은 다르지만 결국 채소를 구할 수 없는 때를 대비한다는 의미는 같다고, 예전부터 내려오던 지혜가 마치 내가 생각해 낸 것인 양 우겨본다.
시래기와 슬롯사이트 지니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아까워했던 나의 그 마음은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생겨난 것이었을까. 저장과 보존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확 후 버려지기 쉬운 부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효율성의 민족답다. 한 잎 한 잎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시래기와 슬롯사이트 지니를 말렸던 조상들의 그 마음은 무더운 여름과 매섭게 추운 겨울을 모두 겪어야 하는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내가 채소가 녹아내리는 여름에 냉동실에서 슬롯사이트 지니를 한 덩이씩 꺼내 요리하는 것도 척박한 인도 땅에서 어떻게든 밥해 먹고 버텨보려는 노력이다. 누가 들으면 웃길 수도 있지만 그 마음만은 비슷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신기한 건 시래기 넣은 떡볶이를 먹으면, 슬롯사이트 지니 넣은 된장찌개 먹으면 힘이 난다. 밖에서 경적소리와 교통체증에 시달리다가 지쳐 집에 들어왔을 때, 화장실 변기에 물이 새서 배관공을 불렀는데 두 번 세 번 전화해도 심지어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을 때, 힌디로 떠드는 스팸 전화가 하루 열 통 이상 올 때(인도 스팸 전화 오는 횟수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게 인도가 나를 지치게 할 때 지극히 한국스러운 이 식재료를 넣은 요리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긴장이 스르르 녹고 또다시 버틸 힘이 생긴다.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상비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