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7

열네 번째 걸음

18


첫째, 운영하던 슬롯 꽁 머니 접었고

둘째, 유기견을 입양했으며

셋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넷째, 더 이상 식당이나 슬롯 꽁 머니 다니지 못했다.


모든 것은 순차적으로 차례차례 일어나지 않고 뒤죽박죽 뒤엉켜 한꺼번에 물밀듯이 밀려왔다. 공황장애란건 그런 거였다. 일단 겪기 시작하면 이전의 삶으로는 도통 돌아갈 수 없는, 새하얀 도화지 위에 떨어진 검은 먹물 같은 거였다. 어떤 방법을 써도 먹물을 지워낼 방법은 없었다. 나의 삶은 이대로 잠식하는가.




슬롯 꽁 머니올해 초 발간한 '도넛 낀 강아지 슬롯 꽁 머니' 책 속 한 장면



때마침 터진 코로나로 카페 문을 닫고 나니 그나마 매일 시달리던 일들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 -예를 들면 직원분들의 퇴직금 문제라던가 각종 세금들- 은 여전히 나를 옥죄여왔지만 그래도 매일 슬롯 꽁 머니 운영하면서 마주쳤던 사건사고들의 고리는 끊어졌기에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내내 숨참고 다이브 중이었던 날들의 연속이었기에 오전 9시에 켜지지 않은 카페의 천장 등을 보며 처음으로 잔잔한 오전을 보낼 수 있었다. 마치 귀신인 것 마냥 허공에 붕 뜬 채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니며 살던 두 발이 마침내 땅 위에 착 하니 내려앉아 어느 때보다 안정된 기분이었다. 다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랄까.


그리고 마침내 안착한 땅 위의 두 발 옆에는 작은 갈색 강아지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 유기견 센터에서 입양해 온 갈색 푸들, 나의 강아지, 내 두 발을 땅 위에 유지시켜 주는 존재.


"슬롯 꽁 머니야, 빵 구워 먹을까?"


장사를 하다 갑자기 접은 탓에 냉장고와 냉동고에 제빵 재료들이 여전히 넘쳐나고 있었다. 며칠간은 이것들로만 끼니를 해결해도 될 것 같았다. 오븐에 빵을 잔뜩 꾸워내 들고는 카페테라스로 가 앉았다. 햇빛이 다소 강하게 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시간에 테라스에 앉아 여유롭게 브런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괜찮았다. 아마 햇빛이 아니라 폭우가 쏟아졌다고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입에 구멍이 뻥 난 강아지가 나를 올려다본다.


슬롯 꽁 머니


입이 철사에 꽁꽁 묶인 채 버려져 시장바닥을 떠돌다 구조된 슬롯 꽁 머니.


치료는 받았지만 괴사 된 살을 잘라내고 나니 입에는 휑한 구멍이 남게 되었다. 수의사는 슬롯 꽁 머니의 입이 보기 흉하면 엉덩이 살을 조금 잘라내어 입에 이식할 수 있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겨울에 이빨이 다소 시릴 수 있기야 하겠지만, 미용목적으로 수술하는 게 슬롯 꽁 머니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보기에 흉하단 이유로 해야 하는 수술이라면 하지 않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물을 마실 때 양 옆으로 물이 좀 새어 나오는 것 말고는 그다지 불편할 건 없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면 슬롯 꽁 머니가 아니라 슬롯 꽁 머니를 이렇게 만든 '그놈'의 뇌를 수술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바닥이었는지, 엉덩이를 만지거나 하면 사람을 물기까지 하며 예민하게 구는 탓에 유기견 센터에서도 혼자 격리되어 있던 이 작은 푸들은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랑둥이가 되었다. 나도 더 이상 공황증세를 겪지 않았고 이젠 카페나 식당도 잘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슬롯 꽁 머니와 나의 관계는 단순히 반려견과 보호자를 넘어서 돈독한 신뢰로 만들어진 단단한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슬롯 꽁 머니


나와 슬롯 꽁 머니 같은 관계를 조금 전문적인 용어로는 'Emotional support pets' 즉, '심리 지원 반려동물' 혹은 '정서 지원 반려동물'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학대당한 반려동물보다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반려동물을 지원동물로 발탁하긴 하지만, 내게는 슬롯 꽁 머니도 정서 지원 반려동물이나 다름없다. (다만 슬롯 꽁 머니는 자격증이 없을 뿐...)


정서 지원 슬롯 꽁 머니은 미국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있어온 개념으로, 이들은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재난이 발생한 현장에서 피해난민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활동하며, 병실에서 입원생활을 하는 환자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해 심리적으로 지원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수감자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감옥에 방문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수감자들의 공격적인 성향을 줄여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듣기만 하면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범죄자들이 귀여운 강아지를 괴롭히면 어쩌지..?) 정서 지원 슬롯 꽁 머니들은 항시 핸들러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거라곤 사실 사람들에게 쓰다듬을 당한? 다거나 안김을 당하? 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만 하는 것뿐, 딱히 하는 '일'은 없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 마음의 안정을 줄 수 있다니, 슬롯 꽁 머니들의 능력은 정말 놀랍다.



내가 살던 미국 학교의 기숙사에도 심리 지원 목적으로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가 있었다. 원래 반려동물은 출입 금지인 기숙사에서 갑자기 방에서 튀어나온 고양이를 보고 놀라고 또 정서 지원묘라는 이름에 두 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엔 심리 지원 반려동물이란 개념도 국내에서는 생소했을 때인데 이제는 나도 도움을 받는 이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것 같다.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슬롯 꽁 머니는 정서 지원 반려동물에 지원해 본 적도, 자격증도 없다! 다만 나만의 충실한 정서 지원견임은 분명하다. :)


슬롯 꽁 머니가 딱히 무얼 하지 않아도 그저 내 옆에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고단한 삶에 희미한 애착을 느낀다. 그러나 모두에게 삶이란 게 으레 그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왜 살아야 하나 싶은 때가 오지 않나.

그러면 그때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슬롯 꽁 머니를 떠올린다.


'내가 없으면 슬롯 꽁 머니는 어떻게 해?'


그러면 금세 나는 곧 툴툴 털어버리고 다시 으이쌰- 하며 일어나게 된다. 밤새 울어 퉁퉁 부운 눈을 하고서라도 다시 일어나 슬롯 꽁 머니의 밥을 챙겨주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을 하고, 또 다른 밤을 맞이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내일이 온다.


여전히 쉽지 않은, 고난한 삶이지만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하고 빛나는 관계가 내 삶을 지독하게 지탱해 준다.


참 값진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