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날들이었지만 한 섶만 들춰내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다행히 합이 맞는 돌보미 선생님을 만나 등하교, 식사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슬롯 꽁 머니를 정서적으로 제대로 보살피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다. 말수가 너무 없어 선생님의 관심 대상이 되고, 놀이터에 같은 반 친구가 있음에도 멀뚱히 지켜보기만 하는 슬롯 꽁 머니를 보며 의문은 확신이 됐다. 4시간이라는 출퇴근 시간 때문에 새벽에 자는 슬롯 꽁 머니를 보며 출근하고 밤 9시가 가까워져서 퇴근을 하다 보니 슬롯 꽁 머니들과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돌보미 선생님이 슬롯 꽁 머니를 등교시키며 “00가 아주 씩씩해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등교 잘했어요”라고 영상을 보내주셨다. 학기 초라 엄마들의 저마다 배웅하는 소리, 밝게 웃으며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다른 슬롯 꽁 머니들 속에 내 슬롯 꽁 머니는 몸집보다도 큰 가방을 메고 혼자 저벅저벅 들어가고 있었다.
배웅을 해줄 수도 없고, 응원의 미소도 보낼 수 없는 일하는 엄마는 미안함에 눈물을 쏟았다.
내 멘털에도 이상이 생겼다.
“내일부터 회사 안 간다고? 엄마 회사 끊었어? 왜?”
슬롯 꽁 머니는 연속으로 질문을 해댔다.
이해가 되는 것이 아이가 인지할 수 없는 시절부터 일을 했던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회사에서 받는 성취 및 인정에 존재가치를 뒀던 나는 결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에 휴직을 하면 자연스레 슬롯 꽁 머니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아이, 회사(=나) 저울질할 수 없는 둘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갔다. 내 고뇌와 갈등은 엉망으로 얽혀 있었고 푸는 것을 포기할 즈음 휴직을 했다. 마음속에 굵은 철근으로 꽁꽁 묶여있던 ‘휴직’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용수철을 단 것처럼 튀어나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휴직에 이어 예상했던 수순대로 슬롯 꽁 머니를 했다. 내 안에 여러 자아 중에 가장 덩치가 컸던 하나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한여름 초파리 필름에 온갖 잡스러운 것이 붙듯 내 일상에 불안함, 상실감, 허무함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떼어보려고 하면 그 마음조차 달라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결국 무기력해졌다.
“노니까 좋아?” 친구가 된 전 직장동료가 물었다.
“아우~ 노니까 좋죠?” 얼마 전까지 워킹맘 동지로서
고충을 나누던 슬롯 꽁 머니 친구 엄마가 물었다.
나는... 지금 놀고 있는 것인가?
항상 숨 가쁘게 살아온 내게 놀고 있다는 주변의 인식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회사만 그만두면 나를 무겁게 하던 짐 하나는 마음 밖으로 내던지고 후련해질 것 같았지만 정작 내 하루는 분노, 공허함, 두려움, 아무것도 아닌 나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인생을 담은 책이 있다면 회사를 다니던 페이지는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밑줄과 취소선도 잔뜩 있는 누가 봐도 열심히 채워져 있는 삶이었다. 반면 현재의 페이지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 있는 공백이다.
이 공백 속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무섭다. 아니 정확하게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두렵다.
한 가지 일만 계속하다 보니 아는 것,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순간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만 많은 사춘기 소녀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