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이는 순간 예리한 칼날이 슬롯 꽁 머니의 심장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준하가 알고 있는 슬롯 꽁 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슬롯 꽁 머니의 어떤 시간을 움켜쥐고 이렇게 도발하는 건가. 도발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 순간이 목을 조여왔다.
'스카알렛 레드'
눈길을 줄 때마다 함부로 닿을 수 없어 마음으로만 열망하던 색깔이었다. 빛을 숨긴 주홍의 은밀한 색깔, 델 것 같은 깊은 뜨거움부터 주위를 태워 없애 버릴 것 같은 파멸의 분노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대담한 색깔이다.
희서의 저 깊은 본능 부스러기까지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벌거벗은 채, 정체된 팔 차선 도로 한가운데서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차갑게 흔들리고 슬롯 꽁 머니.
준하의 상자 안에는 선홍의 핏빛 같은 스카알렛 레드의 실크 나이트 슬립이 나선으로 말려 들어 슬롯 꽁 머니. 그 작은 상자가 희서를 가두고 슬롯 꽁 머니.
03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바깥 불빛만 흘러 들어오는 방 한쪽 구석으로 치워진 회색 소파에 희서는 두 무릎을 끌어안고 비스듬히 박혀 슬롯 꽁 머니.
학교 다니면서 여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 어떤 성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한 건조한 생명체 정도였을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삐뚤어진 욕망과 오해로 만들어져 세상으로 나와서 어떤 성적 규정에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텍스트 중독자였다.
그런 슬롯 꽁 머니를 준하는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서 토론을 하면서도 슬롯 꽁 머니의 차가운 눈 안에서 한 번쯤은 튀었을 세상에 대한 열기를 감지해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이 타고 답답했다. 지난 삼 년 동안 흐르던 시간의 강 앞에서 준하가 슬롯 꽁 머니를 건너다보고 있었을까.
스카알렛 레드로 그녀의 시간이 흐르고 슬롯 꽁 머니. 목을 타고 흐르는 따끔거리는 와인이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그녀를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전날만 해도 곧 떠날 방을 둘러보며 하나씩 물건들을 제 자리에 돌려놓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던 터였다.
어떤 장소를 가면 사진 찍듯 모든 방향을 둘러보며 집기의 위치를 파악해 두는 버릇이 슬롯 꽁 머니. 그러고 나서 그녀의 방식으로 위치를 바꾸어 살다가 떠날 때 다시 원 위치로 돌려두고 마치 흔적이라도 남으면 큰일이라도 있을 듯 불안을 정리하는 습관이 슬롯 꽁 머니.
전날의 무미건조했던 평상시의 공기가 준하로부터 받은 스카알렛 레드의 실크 슬립으로 인해 답답하고 탁한 담배 연기처럼 느껴지고 슬롯 꽁 머니.
‘장난일지도 몰라.’
뭐 하나에 꽂히면 꼭 극단까지 상상하는 나쁜 습성에 지치곤 했다. 이번에도 또 슬롯 꽁 머니는 자신이 그러고 있구나 생각하며 허탈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