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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머신 없어지는 것들

우리 집 슬롯 머신밭에는 원형탈모가 있다. 기나긴 장마로 인해 풀의 한 종류인 슬롯 머신도 폭풍성장을 거듭 중인데 유독 슬롯 머신밭 가장자리 일부는 초록 슬롯 머신 대신 황톳빛 흙바닥이 드러나 있다. 머리카락이 아니니 원형탈초(草)라고 해야 맞겠다. 어쨌든 범인은 아내와 은달이다.


강아지 때부터였던 것 같다. 슬롯 머신 저녁이면 은달이와 공놀이를 했다. 공을 발로 차기도 하고 던지기도 했는데 은달이는 기특하게도 던져진 공을 곧잘 찾아 물어왔다.(더러 뻔히 보이는 걸 못 찾으면 갑갑한 마음에 대신 찾아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얘가 과연 개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처음엔 아내의 행동을 보며 저러다 그만두겠지 했는데 매일 저녁 30여 분씩 8년째 해오고 있다. 가만히 그 둘을 쳐다보노라면 세렝게티 초원에서 쫓고 쫓기는 치타와 가젤영양의 움직임 같기도 하고 야구에서 투수와 1루 주자의 신경전을 보는 듯도 하다. 슬롯 머신 던질까 말까 이쪽 저쪽 위로 아래로 공을 들고 팔을 휘젓는다. 그것도 쉭쉭 거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 동작에 따라서 은달이도 재빠르게 이쪽으로 뛰었다가 저쪽으로 뛰었다가 한다. 그럴 때 슬롯 머신 어느 배우가 했던 대사 한토막을 읊조린다.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내 팔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제.”


공의 궤적과 방향이 다양한 가능성을 가질 때 은달이는 도루왕과 같이 격렬한 투혼을 잔디밭에 아로새긴다. 그래서 그 자리에는 남아나는 잔디가 없게 된 것이다. 잔디가 슬롯 머신 없어진 공지에 아내는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다른 곳에 남아도는 잔디를 떼어와서 메운다. 하지만 땜질한 자리는 55kg짜리 동물이 전력을 다해 헤집는 행위로 인해 금세 맨땅을 드러내고 만다. 그러면 다시 옮겨 심고 드러나고 또 옮겨 심고 드러나고... 아내는 시지프스처럼 묵묵히 그 일을 했다. 놀랍게도 가을 무렵이면 잔디의 생명력은 모진 고초를 이겨내고 박해의 땅을 다시 초록으로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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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행위들은 항상 뭔가를 닳게 한다. 오래된 사찰에 가보면 일주문의 문지방을 이루는 목재가 사람들의 발바닥 세례로 인해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유럽 중세도시의 돌로 된 보도는 반질반질하다. 누대에 걸쳐 걸어 다닌 사람들의 소소한 발자욱들이 그 단단한 돌들을 닳게 만들었던 것이다. 체코의 카를교에 있는 네포무크 동상 아래 동판 일부분은 소원을 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에 슬롯 머신 반짝반짝 윤이 난다. 가까운 곳에서도 물질들은 모두 닳고 있다. 칫솔, 구두, 연필, 타이어, 무릎뼈...


양자역학 강의에서 어느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가 뺨을 한 번 비비기만 해도 얼굴에 있는 원자 수십만 개가 떨어져 나간다고. 게다가 삼시세끼 먹는 밥이 식도를 지나 장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원자를 탈각시키게 되는데 그럼에도 장기가 슬롯 머신 없어지지 않는 건 DNA가 떨어져 나가는 원자들을 대체해서 새롭게 원상회복시키기 때문이란다. 한 달 정도면 우리의 장기 전체는 완전히 새로운 원자로 변환된단다.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들로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슬롯 머신 없어지는 것도 있지만 오래 반복되는 자극에 오히려 더 쌓여가는 것도 있다. 바로 굳은살이다. 내 오른쪽 손가락 중지 끝부분은 아직도 조금 부어 있다. 학창 시절에는 이 부분이 지금보다 훨씬 커서 마치 작은 혹처럼 부풀어 있었더랬다. 펜을 손에 쥐면 중지 첫마디가 펜을 받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키보드가 없던 시절이라 공부할 때는 물론이고 글을 작성하자면 언제나 연필과 볼펜을 이용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중지 첫마디가 혹사당해야만 했다. 반복되는 압력과 마찰은 굳은살을 계속 키운다.


나보다 10살 연상인 5촌 아재가 있었는데 명절이면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왔었다. 개그맨을 했으면 아마도 성공했으리라 생각될 만큼 엔터테이너 기질을 타고났었다. 아재가 오면 집안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치기 어린 학창 시절의 경험담들을 듣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실없는 농담을 풀어놓는 아재를 보며 어른슬롯 머신 철딱서니 없다고 혀를 끌끌 찼지만 우리 어린 형제슬롯 머신 마냥 즐거웠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아재가 문득 다시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는 내가 고등학생 무렵이었다. 접이식 망원경을 옆구리에 끼고서 환한 얼굴로 대문을 들어섰다. 그건 뭐냐는 내 질문에 오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제일 비싼 망원경을 샀노라 슬롯 머신. 왜 망원경이냐고 하니 별을 보고 싶어 졌다 슬롯 머신. 뜬금없는 그의 행동과 말에서 유머감각은 여전슬롯 머신. 하지만 누르스름하게 탈색된 머리를 한 채 그가 내민 손바닥을 보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굳은살이 발바닥보다 더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대서양인지 인도양인지 먼바다에서 참치배를 탔다고 슬롯 머신. 하루에 잠을 4시간도 채 못 자고 일했고 어떨 때는 며칠 동안 눈도 못 붙인 적이 많았다 슬롯 머신. 졸면서 낚싯줄과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샌가 손바닥이 두터워지더라고 슬롯 머신. 심지어 손톱을 깎듯이 칼로 손바닥 굳은살을 깎아내야만 했단다. 그러지 않으면 손아귀를 제대로 쥘 수 없었단다. 자신의 고통스런 날들을 얘기할 때도 그의 익살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의 말은 항상 허풍이 심했기에 어느 정도는 농담인 줄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허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생사를 넘나든 바다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손바닥 굳은살을 칼로 깎슬롯 머신던 5촌 아재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린 우리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짜증이나 성 한번 내지 않고 웃어주던 그였다. 인생길 어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눈보라 치는 고개를 홀로 넘어가더라는 얘기를 친척에게서 전해 들은 이후 그의 소식을 들은 적은 없다.


어쩌면 지금쯤은 고요한 항구에 닻을 내리고 편히 쉬고 있을지도. 혹은 캄캄한 산 정상에서 어린애 같은 눈으로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아픔과 슬픔이 없는 별을 찾고 있을지, 아니면 비 내리는 어느 선술집에서 신산했던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희극처럼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살면 살수록 줄어야 할 내 자존심은 외려 굳은살이 배기고 단단해져야 할 자존감은 슬롯 머신 초라하다. 부산한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는 갈대 같고 기억 속 생채기들은 모질게도 붙어 있다. 이제 슬롯 머신 없어지는 것들은 붙들지 말고 쌓이는 것들은 놓아주자. 더 늦기 전에 힘을 빼고 가볍게 살아야겠다. 언젠가는 다 슬롯 머신 없어질 삶의 껍질에 너무 연연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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