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을 보내며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인정하게 됐다. 나이가 들어 지혜로워진 것아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견딜 재간이 없기 때문에 수용해야만 했던 깨달음이었다. 시작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였다. 우리 집 카지노 게임 사이트 중에 유일하게 아픈 곳이 없던 막내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악성종양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 심장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나에 갑상선 기능 항진증으로 호르몬제를 먹고 있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나에 관절염으로 앞다리를 절뚝이고 스케일링을 받아야 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나에 이제는 이름도 무서운 흑색종으로 의심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까지.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네 마리나 있는데 성한 녀석이 하나도 없다니!
성치 않은 건 카지노 게임 사이트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오랫동안 자가면역 질환을 앓고 있다. 나는 재작년에는 부정맥으로 고생했고 작년에는 경동맥 초음파 검사결과 동맥경화가 시작됐다는 진단을 받아 식단관리에 들어간 상태였다. 게다가 두 달이 넘게 심한 가래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래가 끓으니 기침도 덩달아 심해서 스터디 카페를 끊어 놓고도 가지 못했고 지인들을 만나도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더 답답한 것은 가래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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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게임 사이트도 사람도 집도 어떻게 성한 것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날밤 침대에 누워 그래도 마음만은 온전하게 잡아보려고 노력하다 의문이 들었다. 그래, 인생이란 게 원래 성한 적이 있었던가. 늦은 감이 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성치 않은 게 인생이란 걸. 삶에 자잘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유달리 큰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하고 별일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정이 부답스럽게만 다가왔다. 문제가 점점 커져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겁이 났다. 살아있는 것들은 지속적으로 조금씩 침식되어 간다. 그리고 결국 언젠가 모두 무너진다. 삶에는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저항하고 있었다. 생의 유한함을 두려워하고 생의 불확실성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인생은 성치 않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그날 밤 이후 나의 삶은 편해졌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새로운 문제 앞에서 겁먹은 작은 새처럼 놀라고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얼마 전 건조기가 고장이 났을 때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고 동공에 정체불명의 작은 혹이 생겼을 때는 안과에 가기 전까지 걱정으로 뒷목이 묵직했다. 남편이 한동안 격무에 시달리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때는 그러다 쓰러지면 안 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받아들이고 정서적인 균형을 찾기 위해 애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파악한다.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은 해결하고 해결이 되지 않은 문제들은 품고 간다. 혹시 누군가 궁금해할까 봐 적어보자면 운 좋게 주방벽 콘센트 위치가 나와있는 인테리어 시공 사진을 찾아낸 우리는 25만 원으로 전기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두 달 동안 나를 괴롭히던 가래는 새로 복용한 고용량의 영양제로 인한 역류성 식도염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흑색종 수술은 여러 복잡한 배경으로 아직 보류 중이다.
신기한 사실은 삶이 성치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삶을 오히려 더 온전히 즐기고 싶어 졌다는 것이다. 오래된 집구석은 성치 않아도 산책길 계절의 흐름에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행복하게 바라본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들은 성치 않지만 귀여운 털복숭이들을 꼭 부둥켜안고 사랑을 속삭인다. 나와 남편의 부실한 몸은 성치 않아도 이런 고물가 시대에 단돈 삼만 원으로 기가 막히게 맛난 보쌈에 야채가 듬뿍 들어간 칼국수까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가성비 맛집을 발견하고는 로또라도 당첨된 듯 기뻐한다. 우리는 어느 화창한 봄날, 마당에는 작약이 한아름 피어있고 처마에는 제비들이 집을 짓고 부지런히 새끼를 키우는 카페에 앉아 부풀어 오르는 마음으로 이렇게 속삭이고 만다. 인생은 성치 않지만 세상은 살맛 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