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노는 게 진짜 레전드 재미있었어. 막 속 얘기하고전남친한테전화하고 점호 끝나고 옆방에서 한비랑 민지랑 베란다 난간 타고우리 방으로왔는데 슬롯 머신이띵동 하고애들 막 불 끄고 숨고 난리도 아니었어.”
“평생 가는 추억을 만들었네. 슬롯 머신은 지나고 나면 잊어버리지만 추억은 끝까지 남잖아.”
침대에 누워있던 초밥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나 지금 소름 돋았어. 슬롯 머신 정확하게 반대로 말했거든. 추억은 사라지지만, 성적은 평생 남는다고. 수학여행 다녀와서 성적표 나눠주면서 그랬어.”
추억은 사라지지만 성적은 남는다고? 슬롯 머신 아닌가? 잘못 들은 거 아니냐고 하려다가 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눠주면서 했다는 걸 보면 맞게 들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수학여행 때문에 들뜬 아이들을 진정시키려고 한 말이라고 넘길 수 있지만, 슬롯 머신 선생님이라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는 추론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선생님은 담당도 아닌데 토요일에 하는 배구동아리에 와서 아이들을 불러서 성적상담을 하는 분이다. 시합에 투입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애한테 배구하는 시간이 아까우니 배구부 탈퇴하라고 하기도 했다.
초밥이는 태생적으로 잠이 많은 애다. 세상없어도 잠은 자고 봐야 하는 애가 주말 늦잠을 포기하는 이유는 답답한 학교 생활에서 배구 동아리가 그나마 숨 쉴 구멍이기 때문이다.
“둘 다 맞는 말 같아.”
다음날 함께 산책을 하다가 초밥이가 슬롯 머신다.
성적으로 대학, 직업, 수입이 정해진다는 뜻으로 한 말인가? 초밥이가 왜 그렇게 슬롯 머신을까를 생각하다가 내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의 현재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성적이 평생 가는 삶을 살고 있는 거지. 현재의 부족한 부분이 과거 성적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슬롯 머신는 네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나도 그래.”
지금 여기에도수많은 가능성이 있고, 내가 손만 뻗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믿으며 살고 싶다. 나도 초밥이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추억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누군가와 공유한 일이다.추억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고 슬롯 머신은 혼자만의 성취라고 한다면,슬롯 머신과 추억은 관계냐, 성취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여름에 조성한 아파트 황톳길을 걷고 있었는데, 집에서 나갈 때부터 맨발로 나갔다. 계단 한 층을 내려가서 아파트 두 동을 지나서 산책로까지한평생 맨발 걷기를 하고 있는 보미와 셋이서. 신발을 손에 들지 않아도 되니 가뿐했다. 전날밤 맨발 걷기를 하고 집까지 맨발로 가자고 하면서 내가 그랬다.
"앞마당이 생긴 기분이야!"
문밖만 나가면 좋은 산책길이 있는 것처럼 둘러보면 기회와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며 살고 싶다. 실패와 좌절이 거듭되는 날들 속에서도 믿음만은 잃지 않기를. 중요한 건 믿는 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