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일이 참으로 소설 같을 때가 있다. 뒤집어보면 영화도소설도 노래도 죄다 사람 사는 일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 굳이 소설 같다고 할 일도 아니지만. 길을 걷다가 갑자기 비가 내린 십여 년 전의 그날만 해도 그렇다. 종각 근처의 미팅이 예상보다 일찍 마치는 바람에서대문에서의 저녁약속에 여유가 생겨 모처럼 한적한 기분으로종로에서부터 느린 걸음으로도시의 낮풍경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구세군회관을 지나 역사박물관 앞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후드득 후드득 하면서밀린 일수 빚을 한꺼번에 찍는 것처럼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고, 나는 행여나머리가 젖어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탈모가 촉진되면 어쩌나싶은 마음에 서둘러 버스 정류장의 대기실로 뛰었다. 버스를 타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가지 않을 것이 확실한 소나기성 비 피하기에는 주변에 거기만큼 적당한 곳도 없었다. 전에는 간혹 버스를 기다리던 익숙한 장소였으며 그곳에 정차하는 버스의 노선들은 거의 외우고 있는 곳이기도 바카라. 투명한 지붕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몇 사람이 더 뛰어 온다. 자리를 먼저 선점한 나로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었으나 버스를 탈 것도 아닌 내가 심술을 가져 봐야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조금 지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해 들어왔다. 그때였다, 옆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저, 혹시 선배 아니세요?
이런 경우 대부분 생경한 기분을 맛보아야 한다.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돌리는데 언제 나타났는지낯선상냥함이 나를 보며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비에젖은머리카락을쓸어올리는 여자를 보자누구지? 짧은 시간 바쁘게 머릿속을 헤집으며 기억의 초침을 거꾸로 돌려 보았지만 도무지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대답을 고르지 못해잠시 머뭇거리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할 것을 예상했는지 바카라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예요, 예전에 문학동아리 MT 같이 갔던...
아, 그때 그...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사실 이름자를겨우떠올린 것 외에는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름도 바카라가 방금 알려준 것이었지만, 아무튼-별반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있다면 바카라가 문학동아리의 연합수련회 저녁 술판에서 문학이 세상에 물음표와 함께 야윈 손이라도 내밀어야 하지 않겠는가고침을튀기던 내 의견에 동의하며 박수를 치던 일과, 리포트에 관한 자료를 전해주며한 번의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학교를 떠나야 했으니 열정에 대한 배반은 물론이거니와 인연들도 더불어 종결되었다. 후일 간혹모임에서가벼운 근황들이 줄줄이 지나가노라면 끄트머리에나 이따금씩 등장하던 바카라의 소식은 무슨 잡지사의 기자로 일한다는 막연한 것이었고 나는 곧 잊어버렸다. 이름 석 자도 기억못한 것이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가책이 되지는 않았다. 바카라도대부분그랬을 것이고, 사람 사는 일이 다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직 비는 그치지 않았고 그 사이 버스가 몇 대 지나갔지만 정류장은 만원이어서 몇 사람만 더 가세한다면 누군가는 밀려나 비를 맞을 판이었다. 바카라히 만난 우리의 대화는 트랜지스터의 AM채널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전파되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호기심이 가득한노골적인 눈길을 보내오던터라 나는 자주 말끝을 흐렸다. 게다가 반가워서인지 아니면 놀라서인지 바카라의 목소리가 조금 컸기 때문에 겸연쩍은 마음은 더욱 그랬다. 계속 바카라를 쳐다보기도 민망해 다시 담배 생각이 났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모멸을 감수할 용기는 없었다.
이렇게 만나기도 힘든데 바쁘지 않으면 차 한잔 어때요?
계속어정쩡한 내게 바카라가말을 해왔다.모두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은연중 힐끔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리거나 채근하는 것 같았다. 마침후배와의 약속시간은 아직 꽤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이 무척이나 난감했기 때문에 서둘러 바카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제야 사람들은 하나둘씩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비 내리는 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방에서 빈 서류봉투를 하나 꺼내 바카라에게 건네주고 나는 가방으로 머리를 덮었다. 바삐 걷는 내 곁에서 종종걸음을 걷던 바카라가 갑자기 마음이 변했는지 다시 물었다.
선배, 비도 오는데 기왕이면 맥주가 어때요? 물론간단하게요.
내 의도와는 무관하더라도 호의적인 손을 거절하기 곤란할 때가 있는 법인가 보다. 오랜만에 만났고 정말 비도 오는데 그것도 좋겠다 싶어 선선히 응바카라.우리가 들어간 곳은 다시 구세군회관을 거꾸로 지나골목 안쪽 2층의 작고 조용한 카페였는데 겉으로 보기보다는 실내가 의외로 깨끗했고 주인은 필요한 것 외에는 말이 없었다. 오후는 막 4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바카라가 회사에 연락을 하고 오겠다며 잠시 전화를 들고나간 사이, 나는피식 웃음이 나왔고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고치며 사람 사는 일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바카라. 메뉴에는 대부분의 카페가 그렇듯 별반 차별되는 이름이 보이지 않았고 그런 건 별상관도 없어서 간단한 안주와 맥주 몇 병을 주문했을 때 바카라가 자리로 돌아왔다. 회사에는 취재를 핑계 삼아 바로 퇴근하겠노라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하는바카라는 웃으며 혀를 샐쭉 내밀어보임으로써 지나온 세월을 성큼 되돌아가 내가 기억하는 스물 초입의 귀여운 꼬마숙녀로 변해 있었다. 바카라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시원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제야 바카라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이미 청춘을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도시여자답게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이렇게 미인이었나 싶은 실없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기도 했다. 카페의 음악은 어느새 유행가에서 피아노의 곰살맞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맥주와 안주가 나오자 굵직한 근황들만 나누던 우리는 맥주도 술이라고 제법 어색함이 무마되어 소소한 이야기까지 주고받게 되었다. 바카라는 벌써부터 내 이름이 들려오지 않는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오래전에 등단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용하게도 참고 산다며 각별한 누이처럼 말없이혼자 술잔을 들기도 바카라. 생각지 않았던인연 앞에서는 도리어 마음의 무장도 해제되고 상처의 무게도 얼마간은 덜어지나 보다. 좀처럼 남에게 내색하지 않았던 가슴속에 침전된묵은 일들을 수면 위로 잠시 부유하게도 만드니 말이다. 휴학을 한 후에 공사판을 전전하던 이야기며 땔감으로도 쓰지 못한 책에 대한 일들을 풀어내는데 생각처럼 목에 걸리거나 무겁지는 않았다. 담담히 말을 듣던 바카라는 담배를 하나 꺼내 연기를 한숨과 섞어 내쉬며 말했다.
사연 많은 남자네요? 담배 피운다고 흉보지 말아요.
요즘 그게 흉인가? 그보다 여기는 왜 피스타치오를 껍질째 주는 걸까.
바카라가 다시 말했다. 언젠가는 선배의 글쓰기가 세상에 뚜렷할 줄 알았는데, 설마 포기한 건 아니죠?
내가 다시 대답바카라. 지나간 얘기지, 살아 보니 사는 게 더 치열하던 걸.
잠시 이야기가 겉돌았고 이내 잠시 말이 끊겼다. 술이 조금 남았지만 분위기를 무마할 겸 자기 자리에서말없이치열한 주인에게 맥주를 두어 병 더 주문바카라.이제 바카라도 담장의 높이가 낮아졌는지 자신이 살아 낸 시간을 들려주었다. 대학 때 첫눈에 반한 남자와 유학을 갔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바카라는 그와 유학 중에 결혼을 했고 그만 서른이 되던 해에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런 회상이 바카라를 몇 잔 더 마시게 했다. 결혼 후 잡지사 일에 열정을 쏟는 바카라를 남자는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서로는 한 번도 자기 삶의 희망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에는 언제나 같은 말들.그런 것이 나보다 중요해?그들이 갈등을 겪으며 수없이 주고받던, 환멸마저 느꼈던 말이라고 했다. 바카라가 쓸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선배, 우리가 정말 서로에게 가장 중요했을까요?
나는 말없이 맥주를 잔에 따르고 있었고 바카라가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네, 그랬지만 나중엔 혼란스럽더군요. 뭐 이젠 다 끝난 이야기지만.
어떤 사랑에는포기라는적당한 제물이 주기적으로 있어야 하고미처 준비를 하지 못하면 제단이 망가진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들이 벌어지는 간격과 틈을 견디지 못해몸과 마음이 납덩어리가 되었을 때, 마침내 그들은 서로에게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로 들끓어 넘치다가 종국에는 중생대 정도의 화석이 되고만것이다. 피스타치오 껍질은 내내 불편했고 이제 시계는 막 6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달리 해줄 말 같은 건없었다. 바카라도 나도 어떤 위무나 현학적인 답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있었기에 더욱 그랬다.우리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맥주를 마시며 묵묵히 서로의 말을 들어준 것으로 이미 충분했으니 서운할 것도 바랄 것도 없었다. 그들 역시 자신에게 충실했을 것이나 서로를 사랑하는 태도와 방향이 달랐을 뿐. 무엇보다 아직 삶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느닷없이 쏟아진 물풍선처럼 그녀와 나는 시원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여 한동안 말을 잊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비가 그친 거리는 한층 또렸해져 있었고 카페를 들어설 때부터 선약이 있노라 미리 언질을 주었기에 서로 헤어지는 일에 주저할 필요도 없었다. 명함을 주고받았지만 그녀도 나도 먼저 연락하거나 해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도 알고 있으리라. 다시 한참이 지난 먼 훗날 바카라히 만나져도 좋다는 것을.간혹 혼자서 안부를 생각할 수도 있고, 잘 살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어색한 간격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원할 때 만날 수 없더라도 가끔은 잊고도 살고 어떤 날은 문득 궁금하기도 한, 소소하고 적당한 인연으로 기억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바카라는 그렇게 내 오후에서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갔고, 약속시간을 넘긴 나는 뛰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