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는 새벽 1시까지 이어지다 진정하고 눈 좀 붙이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티슈로 대충 훔치고 자리에 누웠다. 울었다 웃었다 하며 보낸 격정의 시간들은 다음 날 아침 '바카라의 1일은 이야기가 시작된 4월 12일인가, 이야기가 끝난 4월 13일인가'를 정리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기쁨과 놀라움, 자기혐오와 절절함이 교차하던 눈물의 밤을 보낸 것 치고는 아주 캐주얼하고 세속적인 행동이었다.
인간이란.
퉁퉁 부은 눈은 안경으로 감추고 집을 나섰다. 남들이 보기엔 '부었든 안 부었든 그게 그거인 작고 바카라 실눈'이겠지만 눈가의 묘한 당김이 어제의 일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어제부터 1일이든, 오늘부터 1일이든, 시작점이 어디든 간에 우리 두 사람 관계에 붙은 이름표가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시작은 여기부터다라고 명확히 그어두고 시작하고 싶었다. 랜선연애 비슷한 느낌을 털어내고 현실적인 관계 구축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이성적인 척을 하고 있지만 내 마음속 간질간질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바카라 아니었다. 마음 어딘가에 붙은 따끈따끈한 '연애 중' 딱지를 보듬고 있는 것만으로도 항상 보아오던 매가리 없는 아침 풍경은 훨씬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온갖 것에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지금 내 앞에 있는 다리 쭉 뻗고 자는 대머리 아저씨. 가뜩이나 짜증 나는 출근길, 다른 사람 설 자리까지 하나 더 해 먹고 옴팡지게 코까지 고는 이 아저씨.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의 나는 분명 '이 사악한 대머리는 머리만 뜨문뜨문하지 양심에는 모발이 무성하다'며 마스크 안 쪽에서 입술을 달싹달싹 '시옷'바카라 '비읍'해 악담을 퍼부었을 터인데, 오늘은 연민, 그저 연민이다. 얼마나 피곤하시면 양심도 못 챙길 만큼 정신을 잃으시고. 어휴, 아휴, 에휴.
나이가 차면 누군가와 사귀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왜 아무도 안 만나냐, 뭐라도 찍어 바르고 밖으로 나가라'라고 질타하는 풍조가 싫었다. 사랑이니 연애니 바카라 것들보다 나 한 몸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왜 다들 그렇게 연애를 강요할까.
그랬던 내가 '아침 풍경이 선명' 어쩌고, '너그러워지는 기적' 저쩌고 하고 있다니.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로까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바카라 것'의 축이 아주 약간 옮겨져 가고 있는 것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간 타지에서 스스로를 기르기 위해 아등바등 매달리던 회사, 일, 거기 얽힌 인간관계, 그 외 잡다한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주는 자극들은 아무래도 좋게 느껴졌다.
일요일 낮.
바카라는 다시 아카바네에서 만났다. 원래 이번 주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었다. 토요일은 선약이 있었고 일요일은 오랜만에 집에서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집 좋아하는 나 같은 애들은 주말 이틀 중 최저 하루는 등에 침대를 발아시켜야 다음 주를 살아나갈 수 있다. 지난주는 얼떨결에 이틀 내내 그를 만났고, 그 후론 매일 잠잘 시간을 쪼개가며 두세 시간씩 통화하는 고된 강행군이 이어지고 있었다. 슬슬 에너지 고갈 버튼이 깜빡, 깜빡.
하지만 결국은 만나게 되었다. 일요일이 되자 그가 보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왔고, 내 기분 역시 그러했기에 한동안 나 몰라라 하던 방청소를 다시 한번 내팽개치고 나갈 준비를 했다. 편도로 2바카라이나 되는 거리를 매일같이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만날 수 있을 때 만나두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을 나서기 직전, 냉장고를 열고 차갑게 식은 아사히 슈퍼드라이 생맥주캔을 하나 꺼냈다. 발매되자마자 전국적인 품귀현상으로 좀처럼 구할 수 없던 전설 속의 맥주다. 어제 집 앞 마트에 갔다가 발견해 하바카라 내가 마시고 하바카라 언젠가 그와 만나면 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것이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아카바네 역으로 향바카라 길, '아, 내가 지금 어플에서 만난 사람을 만나러... 이게 대체 뭐 바카라 짓인가' 바카라 자괴감은 없었다. 순수하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앉아 열린 창틈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을 즐겼다. 호수공원을 향해 유모차를 끌고 걷는 부부, 지팡이 짚고 산책 나온 할머니, 줄줄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네 꼬마들. 저절로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역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장난스러운 인사를 한 뒤,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왔다. 마치 데자뷔처럼. 일주일 전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지. 내 손이 쏙 바카라가는 그의 손은 여전히 크고 따뜻했으며 살짝 땀이 배어있었다.
"아, 미안. 땀 닿는 거 기분 나쁘지."
그는 자신의 재킷에 슥슥 땀을 훔치더니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아직까지 긴장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겨우 세 번째 만났으니 아직 긴장을 탈 만도 하다. 약간 귀엽다. 바카라는 조금 걷다가 한 타치노미야(立ち飲み屋, 서서 술을 마시는 이자카야)로 들어갔다. 비좁은 가게 안은 코로나가 걱정되고, 바깥은 꽤 따뜻했기에 야외에 설치된 드럼통 같은 테이블에서 먹기로 했다.
맥주를 기다리는 사이 그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 안주머니에서 내 이어 커프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하룻밤 잔디밭에서 이슬을 맞고 왔는데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또 잃어버릴까 봐 화장품 파우치 안에 고이 챙겨 넣고 그 김에 집에서 가져온 맥주캔을 그에게 주었다. 어디서 이런 귀한 걸 구했냐며 송아지 같은 눈이 동그래졌다. 가져오길 잘했다.
바카라는 맥주와 하이볼 두어 잔을 마시고 가게를 옮겼다. 하시고 자케(梯子酒)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사다리 술, 한 칸 한 칸 사다리를 올라가듯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마시는 술을 의미한다. 아카바네는 저렴한 선술집이 많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마시는 재미가 있다.
아무리 매일 긴 통화를 이어왔었다 해도, 함께 있으면 새삼 서로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다는 걸 느낀다. 오늘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는 얼마간의 새로운 그를 발견했다. 그는 손에서 땀이 잘 나는 체질이고, 뭐든 순간적인 직감으로 고르는 나와 달리 뭘 먹고 마실지 주의 깊게 고민하는 사람이며 (아마 우유부단한 성격인 것 같아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야 덜 하지만 아직도 약간 뚝딱거리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 대신 들어주기도 바카라, 차도와 인도의 구별이 불분명한 길에서는 나를 건물 쪽으로 밀어 넣고 본인이 차도 가까이에 서서 걷는 사람이었다.
"리정혁 씨."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주인공 리정혁 흉내라고, 내가 못 알아볼까 봐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 가면서. 전화와 문자만으로는 알 수 없던 것들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워 나 스스로가 그어둔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채 몰랐을 그의 모습들.
지난 두 번의 만남에서와 달리 '나 사실 음식이나 풍경사진 찍는 거 좋아해'라고, 뭘 먹기 전에 음식 영정사진부터 찍는 나 역시 그에게는 '전화로는 알 수 없던 나' 일 것이다. 바카라는 앞으로 얼마만큼 더 '새로운 서로'를 발견하게 될까. 그리고 그 모습은 각자에게 어떤 인상으로 마음에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