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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가상 바카라 이야기

찹쓰알~ 떠억~ 망개애~떠억




겨울도 다 지난 애매한 시점에 갑자기 한겨울 가상 바카라 이야기를 하게 된 건, 뜬금없이 매서운 꽃샘추위에 눈물을 질질 흘리다 문득 지난 겨울 겪었던 찐한 현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 세대, 그러니까 이른바 7080 세대가 어렸던 시절 한 겨울에는 간식거리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씩 대문 밖에서 '찹쓰알~ 떠억~ 망개에~ 떠억'을 목청껏 외쳐대는 가상 바카라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이야 뭐 겨울이고 나발이고 간식거리는 항상 넘쳐나고 찹쌀떡보다 5만 배쯤 맛있는 게 너무 많다 보니 겨울밤 골목골목을 돌며 찹쌀떡이나 망개떡을 외치는 떡행상은 상당히 보기 드문 풍경이 되었다.


그럼 그 시절 그 많던 가상 바카라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7080의 시절 주택가 골목골목을 누비던 가상 바카라들은 이제 도심 속 유흥가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다.


각종 술집과 식당이 밀집한 먹자골목에서 아무렇게나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노라면 어느 틈엔가 허름한 행색의 가상 바카라가 스르륵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가상 바카라는 고기굽는 연기가 자욱한 가게 안을 빠른 속도로 훑은 다음, 이미 얼큰하게 술이 올라 발개진 얼굴의 가상 바카라에게 허접한 종이상자로 포장된 찹쌀떡을 내민다.


사장님 떡 하나 사세요. 맛있어요. 5천 원이에요.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면, 가상 바카라를 제외한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일단, 가상 바카라의 타깃이 된 얼큰한 손님은 눈 앞의 술과 고기를 놔두고생뚱맞게 지금 찹쌀떡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아 거 딴 데 가서 알아보시라' 하기엔 왠지 동석한 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좀 구기는 것 같고 모양도 빠지는 것 같다(게다가 노련한 가상 바카라는 딱 봐도 썸띵 꽤나 가능할 것 같은 남녀가 합석해있는 테이블을 먼저 찾는다).


그러다 보면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가상 바카라는 굳이 지금, 여기까지 들어와서 나한테 왜 이래?'


얼큰한 손님이 다소간의 짜증을 섞어 배가 부르다는 둥, 치아가 영 시원찮다는 둥 궁색한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을 무렵, 그 옆 테이블 손님은 어쩐지 가상 바카라의 다음 타깃이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서둘러 잔꾀를 궁리한다.


얼마 전에 임플란트를 해서 도통 씹을 수가 없다는 핑계는 내가 먼저 하려 했는데 이미 얼큰한 가상 바카라이써먹어버렸고, 또 그런 핑계로 위기를 모면하자니 눈치 없는 알바가 아까 주문한 돼지껍데기를 하필 이때 가져오는 바람에 영 자세가안 나온다.


그렇다고 어설프게잔돈이 없다는 식으로둘러댔다간 왠지 저 가상 바카라가 떡으로 거스름 돈을 챙겨줄 것만 같다.


가상 바카라들 뿐만이 아니다. 가게 주인은 주인대로 표정이 좋지 않다.


가상 바카라는 아무렇지 않게 남의 영업장에 들어와 버젓이 자기 물건을 팔고 있고, 어쩌다 재수로 떡 몇 개를 판다09


가상 바카라의 타깃이 된 손님들은 원망과 호소가 반씩 섞인 눈빛으로 가게 주인을 쳐다보며 가상 바카라가 던진 시련에서 구원하지만, 보는 눈도 많은데 가게 주인이 냉큼 나서서 가상 바카라를 쫓아내기엔 간이 작다.


그러니,가상 바카라가 테이블을 종횡무진하는 동안 가게 주인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르다 투덜거리는 손님에게 냉큼 콜라 서비스나 가져다준다.




그 날, 흐드러진 삼겹살 연기 속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하잘 것 없는 잡소리나 지껄이던나는 솔직히 고백건대 가상 바카라가 불쾌했다.


어디를 간들 이 시간에 찹쌀떡이 제대로 팔릴 리 없었지만, 아무튼 굳이 남들 먹고 마시고 노는 곳에 아무렇게나 끼어들어 제 멋대로 흥을 깨는 가상 바카라가 적잖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테이블 한 구석에서 물끄러미 가상 바카라를 바라보던 직원 B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가상 바카라에게 다가가더니 만원 한 장을 내밀었다.


이미 두어 차례 떡 팔이에 실패하고 다음 타깃을 찾던 가상 바카라는 생각지도 않던 손님의 등장에 다소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하나에 5천 원 하는 떡이니 두 개를 주겠다며 주섬주섬 봉지를 꺼내 떡을 담기 시작했다.


B는 분주한 가상 바카라의 손놀림을 잠자코 기다렸다가 기어이 떡 두 개를 받아 들었는데, 가상 바카라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곧 떡판을 짊어지고 가게를 떠났다.


가상 바카라가 사라지자 더 이상 눈치 볼 것이 없어진 손님들은 다시금 술잔을 부딪히며 끊어졌던 흥을 잇기시작했고, 자욱한 숯불 연기와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상 바카라의 빈자리는 금세 메워졌다.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양손에 떡을 쥐고 자리로 돌아온 B에게 다른 직원이 물었다.


"에이 형님, 그 떡 드실 거예요? 그냥 대충 둘러대고 마시지 뭐하러 두 개씩이나 사셨어요."


사실나도 똑같은 말을 하려다 선수를 빼앗겨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서슴없는B의 대답에 나는 갑자기 진한 현타를 맞게 되었고 차라리 선수를 빼앗겨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 떡 싫어해.저 사람도 좋은 부모 만나 좋은 교육받고 자랐으면 다른 인생을 살았겠지. 날도 추운데 어디 가서따뜻한 밥 한 끼 사 먹으면 좋잖아."


우리 테이블사람들은 모두숙연해졌다.


그건 평소 어지간한 쿨가이따위 양손으로 뺨을 후려칠만큼시니컬한 B가의외의 언행을 보인 탓이기도 했지만, 모두가 알면서도누구나외면하고어떤 이의 속사정을 직시한 B의 용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조금 전 B의 돈을 받은그 가상 바카라가 떡판을진 채편의점에 들어가뚜껑이 빨간 소주들고 나오는걸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솔직히 부끄러웠다.


가상 바카라의 처지가 딱하다고 생각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실 매우 쉽다.


그런데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사실 매우 어렵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눈치만 보는 사이에 가상 바카라가 딱하다는 조금 전의 생각은 이 상황이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생각에 압도당하기 시작한다.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생긴 마음은 어느 틈엔가 딱딱하게 굳어져서 더 이상 행동으로 옮길 무언가가 없어진다.


이 찰나와 같은 마음의 변곡점에서 B는 과감하게 행동으로 나섰으니 과연 그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밤거리의 가상 바카라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뭐 그렇다고 내가 그날 이후로 가상 바카라만 보이면 쪼르르 쫓아가 떡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취객에게 불쑥떡을 들이미는 속사정에 비하면 잠깐의불편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가상 바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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