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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슬롯가 어때서?

썬데이파더스클럽 (10)

“글씨가 좀… 그렇지?”

“뭐… 나도 글씨 잘 쓰는 건 아닌데 뭐. 학년 올라가다 보면 차차 나아지겠지.”


파라오 슬롯가 삐뚤빼뚤 쓴 일기장을 보는 아내의 얼굴에 살짝 근심이 스쳐 지나간다. 순간 멈칫했지만, 짐짓 모른 체 아내를 달랬다.


유난히 찬 이번 겨울을 지내고 나면 첫째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된다. 이제는 학교라는 공동체 생활에 온전히 적응한, 그리고 동시에 공부에 대한 부담 역시 조금씩 늘어나는 시기를 파라오 슬롯와 부모가 모두 맞고 있다. 전에는 '뭐 좀 지나면 괜찮겠지' 하고 넘겼던 사소한 것들도 ‘설마…?’ 하며 점점 걱정으로 바뀌어가는 때다.


파라오 슬롯는 왼손잡이다. 돌잡이를 할 때도, 처음 수저를 쥘 때도 자연스레 왼손이 먼저 나갔다. 공룡에 미쳐있던 어린이집 시절엔 왼손으로 줄기차게 공룡을 그렸다. 글씨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파라오 슬롯는 자연스레 왼손으로 연필을 잡았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편안한 그 손으로.


파라오 슬롯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모습을 옆에서 본 파라오 슬롯 할머니가 뭐라 한 마디 보태려 할 때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막았다. “왼손이 뭐가 어때서요?”


나도 파라오 슬롯다.


불행히도 파라오 슬롯에 얽힌 기억들은 썩 유쾌한 기억들은 아니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그때부터 기억 속 어른들은 끊임없이 내 파라오 슬롯에 혼을 냈다. 파라오 슬롯으로 밥 먹으면 복 달아난다. 파라오 슬롯으로 글씨 쓰면 안 된다. 오른손으로 밥 먹고, 글씨 써라. 오른손이 바른손이다…


의식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왼쪽 어깨가 조건반사처럼 먼저 나갔다. 파라오 슬롯이 먼저 나가서 스스로 움찔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몇 번이고 혼이 난 다음에는 어깨에 붕대를 감은 듯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영 익숙지 않은 오른손을 내밀고는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오른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밥을 먹고, 글씨를 쓰는 것뿐이다. 오른손으로 편하게 젓가락질을 하게 된 것도 초등학교 6학년이 다 되어서였다.


한창 파라오 슬롯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글러브 끼고 야구하는 파라오 슬롯들이 너무 부러웠던 나는 몇 날 며칠을 글러브를 사달라 졸라댔다. 파라오 슬롯 성화를 못 이긴 끝에 퇴근길 아버지가 사 온 싸구려 비닐 글러브는 당연히도(!) 오른손잡이용이었다. '오른손으로는 캐치볼을 할 수가 없는데…?'


그날 내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보나 마나 울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구하기도 어려운 파라오 슬롯용 글러브를 다시 사달라 보채는 건 어린 맘에도 너무 지나친 일이었다. 늘 왼손은 쓰면 안 되는 손이었는데, 차마 그 왼손을 위한 무엇을 해달라고 더 떼를 쓸 수가 없었다. 지나고 돌이켜봐도 어린 시절을 통틀어 가장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 중 하루였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해보니, 파라오 슬롯 오른손 할 것 없이 다들 큰 문제없이 살았다. 해외에서 만난 친구들은 더했다. 아니 도대체 난 어릴 때 왜 그렇게 혼나야 했을까? 파라오 슬롯을 쓰는 게 생사를 가를 만큼 중차대한 일도 아니었는데.


태어난 파라오 슬롯가 왼손잡이임을 알았을 때,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하나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본인이 가장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근육을 쓰도록 놔두는 것. 부모로서 파라오 슬롯가 자라면서 챙겨야 할 것은 그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 너무 지나친 참견이라 생각하는 건 먼저 알아서 삼가자고.


파라오 슬롯의 글씨가 아직도 초등학교 갓 입학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게 왼손잡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는 한국어 가로 쓰기가 왼손잡이에게는 다소 불리한 방식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꼭 그것 때문에 또래 파라오 슬롯들보다 글씨가 덜 단정하다고 볼, 그래서 글씨 쓰는 손을 오른손으로 바꿔야 할 과학적(?) 근거를 아직은 못 찾았다. 글씨 쓰기 연습을 좀 더 하면 나아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전에 손글씨 조금 삐뚤빼뚤한 것 정도가 파라오 슬롯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ChatGPT 같은 생성형 AI가 요즘 한창 IT 업계의 화제란다.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창작의 영역마저 인공지능이 인간을 도와주는 세상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데, 손글씨 좀 못쓰면 어떤가.


‘사람들은 왜 파라오 슬롯를 낳을까?’

(...)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p.79-80》 (창비, 2011)


파라오 슬롯를 키우면서 가장 좋은 점은 잊어버렸거나 잘 생각나지 않는 나의 어린 시절을 한 번 더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강동원 송혜교 주연의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던 김애란 작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번 레터는 이 생각을 다시금 일깨워 준 손현 작가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빚을 지고 있다. - 저자 주


파라오 슬롯와 살며, 어린 시절을 다시 한번 살아가고 있다. 왼손 쓰다 혼났던 일처럼 썩 좋지만은 않은 기억도 되살아날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육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다. 영문도 모르고 혼나서 풀 죽어 있던 어린 나를 다시 만나고, 그 파라오 슬롯가 가진 상처를 다시 보듬으며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 함께 사는 파라오 슬롯들이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도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지난 연말에는 첫째와 함께 남자들끼리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이름하여 ‘하고 싶은 것 다 해도 돼 여행.’ 평소에 늘 동생이랑 싸우지 마라 사이좋게 지내라 주절주절 잔소리만 늘어놓는 게 미안하던 차였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는 첫째가 가장 바라는 소원, 본인이 늘 갖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닌텐도 스위치’ 게임기를 선물로 안겨 주었다. 그리고 여행 내내 실컷 하게 내버려 두었다. (아내가 동행했다면 못내 떨떠름해했을 것이다.)


한창 포켓몬을 잡으며 옆에서 싱글벙글인 파라오 슬롯는 모르겠지만 그 게임기, 사실 알고 보면 삼십여 년 전 비슷한 또래였을 어린 내가 우리 파라오 슬롯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친구네 집에 있던 재믹스나 게임보이 게임기가 그렇게 부러웠지만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그 마음, 아빠는 너무 잘 아니까.



파라오 슬롯


정민@jm.bae.20


다음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파라오 슬롯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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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UnsplashKelly 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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