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친구를 데려온다. 생일 잔치를 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딸의 생일이 아니라는 거다. 친구의 생일 잔치를 슬롯집에서 한단다. 으응?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럽다는 거다. 물어보지도 않고 아이들이 슬롯 집으로 들이닥친다. 오래된 빌라 1층은 단열재를 너무 아낀 탓인지 수시로 곰팡이가 핀다. 주인에게 말했더니 문방구에서 파는 스폰지를 방수 벽지 대신 발라놓고 갔다. 그런 집인데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슬롯 집을 찾는다. 딸의 친구 중 한 아이는 생일 선물로 '희원이 엄마'를 받고 싶다고 했단다(나는 언급 없었다). 아들 친구도 마찬가지다. 금요일 밤에 와서 밤새 게임을 하다 간다. 나는 마치 피씨방 알바처럼 아이들에게 카드를 건넨다. 밤새 게임에 지친 몸을 편의점 메뉴들로 달래라는 의미다. 이제 아이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슬롯집을 들락거린다. 이게 다 와이프 때문이다.
민혁이가 방학을 맞아 다시 집에 왔다. 초등학교 입학 전 '가정체험 학습'으로 슬롯 집에 처음 들른 아이가 이제는 고3이 되었다. 다이빙 국가 대표 출신의 민혁이는 조금 아픈 아이다. 집 근처에 있는 서울대 병원을 수시로 들러야 한다. 그런데 병원 예약 일주일 전에 말도 없이 슬롯 집을 찾았다. 어제는 친구 대훈이와 길현이를 데려왔다. 모두 같은 보육원 출신의 아이들이다. 삼겹살을 다 함께 구워 먹고 한참을 놀다가 갔다. 대훈이는 민혁이가 서울로 올라오면 이모집에 언제 가느냐고 수시로 묻는다고 한다. 모두 건실한 대학생들이다. 슬롯가 모르는 사실이지만 보육원의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몇 백의 돈을 쥐고 혼자 독립을 해야만 한다. 대부분 그 돈으로 오토바이를 사서 배달을 한다. 이렇게 대학을 진학해 스스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이유이다. 그러나 이들은 앞으로 많이 외로울 것이다.
내 입장은 다소 중립적이다. 두 아이를 책임진 가장으로써 다른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사실이 솔직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와이프는 나와 많이 다르다. 아이들의 친구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다. 십 년 넘게 슬롯집을 찾은 민혁이는 입양까지 고려했었다. 뒤늦게 친모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산되긴 했지만 하마터면? 세 아이의 부모가 될 뻔 했었다. 이 모두가 와이프 때문이다. 버려진 고양이를 데려오고, 소외된 아이들을 틈만 나면 챙긴다. 반전세를 사는 자기 사정은 고려도 하지 않고 자꾸만 사고를 친다. 그런데 이를 적극적으로 말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와이프는 이렇게 남을 돕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다. 와이프를 움직이는 힘은 어떤 것일까? 소리 소문 없이 누군가를 돕는 미담의 주인공들이 있다. 아마도 와이프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라도 달라서 다행 아닌가. 쥐뿔도 없으면서 퍼주면 정작 슬롯 식구들은 누가 챙긴단 말인가. 나의 이기적 유전자를 뭐라 한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일단 나는 슬롯 식구들부터 제대로 챙기자는 주의니까.
하지만 아이들이 찾아오면 나도 기분이 좋다. 민혁이와 친구들에겐 나의 세 번째 책 '스몰 스테퍼'를 주었다. 이들에게도 바람막이가 되어줄 사람들이 필요하지 싶었다. 이모부가 어떻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변화해갔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미 '스몰 스텝'은 민혁이의 보육원에서 유명한 책이 되었다. 민혁이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실었기 때문일 것이다. 민혁이도 자신의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다고 한다. '이거 이모집 이야기제?' 다소 민망한 얘기였지만 반갑기도 했다. 그래도 와이프 같은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숨을 쉬지 않겠나. 딸의 친구들이 떠난 후 식탁을 보니 손으로 휘갈겨 쓴 메뉴판이 놓여 있다. 와이프가 준비할 수 있는 음식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참 재미있는 와이프다. 정말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게 보였다. 그나저나 앞으로 또 어떤 사고를 칠지 걱정이다. 고양이만 3마리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라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말려야겠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 슬롯 식구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