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BGM | 슬롯 머신의 목가
Fred Hersch - Pastorale

... 바람이 흩날리자 갓 핀 노란 꽃이 우르르 봄을 쫓아 흔들립니다. 슬롯 머신는 사시사철 겨울같고 사람들의 옷가지가 아니면 계절을 쫓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봄은 옵니다. 자그마한 꽃망울이 아직 이 ‘앙’물고 작게 돋을랑 말랑하는 가지나 아직 푸른기도 없이 창백한 개나리도 일단 노란꽃부터 냅다 들이밀고 봅니다. 불쑥 내민 노란 개나리꽃 쫑알대는 소리는 균일하고 나긋합니다.
오래된 빌라 앞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깨진 붉은 벽돌이 그동안 얼마나 거친 세월을 살았는지 알려줍니다. 잔인했구나, 아팠구나, 서러웠구나. 슬롯 머신는 딱딱하고 목동도 없이 신호등 불빛에 맞춰 무표정으로 걷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닙니다.
on BGM - Fred Hersch Patorale Piano
자박한 피아노 선율따라 벽돌을 세며 걸었습니다. Pastorale슬롯 머신적인 풍경은 하나도 없는 황량한 이 길을 사람들은 언제부터 버석하게 걸었을까요. 깨진 아스팔트 틈에서 조그맣게 올라온 풀이 유난히 눈에 크게 띈 것은 분명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일정한 걸음으로 채워나가는 음악선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 길가에는 가지치기를 당한 나무들이 직선으로 시원스럽게 뻗어있습니다. 너무 일찍 가지를 쳐내서 새들이 앉을 곳이 없습니다. 새로 페인트칠 한 아파트 외벽을 배경으로 참 멋지고 외롭게 서 있습니다. 잠깐 나도 제자리에 나무처럼 서 있어 봅니다. 슬롯 머신적인 피아노를 나무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나무 등걸에 이어폰 한 쪽을 대줍니다. 우수수 흔들 잎이 아직 없지만 슬롯 머신풍 피아노 선율이 이 나무에게 꿈을 꾸게 해줍니다. 눈을 감고 같이 음악을 들으면, 멀지 않은 미래에 금방 잎을 내고 꽃을 피워서 이 삭막한 아파트 단지에 소박한 슬롯 머신풍으로 나뭇잎 스치는 소리를 내는 나무의 꿈이 펼쳐집니다. 나무껍질은 부드러워지고 새들도 앉을만한 자리를 만들어 냅니다. 계절을 뿜어내고 동네 사람들 말소리를 엿듣습니다.
나는 같은 음악을 한 번 더 듣기로 하고, 아직 외로운, 춘삼월이 다 가도록 봄이라는 목동을 만나지 못한 우리 동네 담장을 걷기로 합니다. 지겨운 아스팔트를 뚫고 땅이 꿀렁입니다. 그 리듬과 내 걸음과 자박한 피아노 리듬이 딱 맞아 떨어집니다. 내가 봄의 목동이 된 듯이 행복합니다. 바람이 웃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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