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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슬롯


“너랑 슬롯 한번 해보고 싶어.”


어느 날, 재영은 이렇게 말했다. 재영은 친애하는 글쓰기 동료다. 내가 수영을 주제로 쓴 몇 편의 에세이를 읽은 재영은 너랑 글 한번 써보고 싶다, 가 아닌 수영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통화로 ‘오늘도 수영 강사를 웃겼다.’는 말을 전한 후였다. 재영은 대체 어떻게 수영을 하길래 슬롯들이 웃는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지도 궁금하다고 했다.


“강사님한테 너 슬롯하는 거 한번 찍어달라고 하면 안돼?”

“단체 수업받는 슬롯 많은 공공 장소라 그건 좀.”


재영은 넌지시 자신은 슬롯 다닐 때 중급반에 있었노라 자랑하기도 했는데. 이는 언젠가 둘이서 헤엄을 칠 날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는 정보로 남겨졌다.


“얼마나 좋은 일이야. 운동도 하고 슬롯들에게 즐거움도 주고.”


슬롯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재영은 긍정의 아이콘이 되어 반응했다. 그는 새벽 6시에 슬롯 수업을 받는 것도 1년이 넘게 슬롯을 다니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며 격려했다. 그러게. 나는 오늘도 강사를 웃겼다. 정확히 말하면 웃길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그가 웃고 있었다.


접영을 하던 중이었다. 숨이 차서 벌떡 일어섰을 때 나를 보며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강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이 벌릴 수 있는 최대 크기만큼 입을 벌린 채로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을 옅은 미소나 흐뭇한 미소로 표현한다면 틀렸다. 빵 터졌다, 혹은 표복 절도로 표현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나는 맥락상 강사의 웃음에는 내가 깊게 관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더하지 못하고 으하하 슬롯만 해서, 나도 멈춰서 잠시 미소 지은 후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계속 내 갈길을 가야했다. 강습 중이니까.


슬롯 강습이 끝나고 만난 다루에게 오늘따라 강사가 너무 크게 웃더라는 이야길 했다. 그러자 다루는 무언가 생각난 듯 웃었다.


“강사 웃는 거 나도 봤다.”

“그래?”

“레인 끝까지 헤엄쳤다가 걸어서 나오는데 너희 반 강사가 만화처럼 웃고 있대.”

“맞지. 완전 크게 웃지? 진짜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웃고 있다니까.”

“자세히 보니까 네가 앞에 있더라고.”


나는 잠자코 다루가 이어갈 말을 기다렸다.


“궁금해서 나도 걸어가면서 네가 슬롯하는 거 봤거든. 대체 네가 어떻게 슬롯하길래 웃나.”


어땠어? 라고 재촉하듯 묻는 내게 다루는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는 듯, 한번 크게 웃은 후 말했다. 말로 표현이 안돼. 어떻게 슬롯의 머리 어깨 다리 팔이 저렇게 따로 놀 수 있나 싶었어. 몸이 생존을 위해 완전히 각기 움직이는 느낌. 남편은 약간의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한마디로 크레이지 수영, 미친 수영 같았어. 남편은 나의 몸짓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말들을 열심히 골라냈고 끝내 ‘크레이지 수영’이라고 정의했다. 그것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말이다.


다루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슬롯하는 내 모습을 찍어서 보고 싶다는 욕망을 거뒀다. 다루 말대로- 나의 미친 슬롯을 보고나면 다시는 슬롯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다. 터키 속담이 생각나기도 했다. ‘지혜로운 여인이 다리를 발견했을 때, 정신 나간 여인은 이미 강 건너편에 있다.’ 어쩌면 나의 미친 슬롯은 터키에서는 존중받을 지도.


새벽 수영 강습에 나간 지 2년 째. 누군가는 묻는다. 좀처럼 수영이 늘지도 않는데 속상하지 않냐고, 꾸준히 못하는데 부끄럽지 않냐고도. 물론 강사님처럼 대놓고 웃는 슬롯을 볼 때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여전히 겸연쩍다. 하지만 웃음이라는 건 막으면 더 크게 번지는 속성이 있지 않은가. 나는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웃음은 축복이라고 생각하므로. 강사의 웃음을 당연히 나무랄 생각이 없다.


“근데 내가 글쓰기 수업을 진행 할 때말이야. 아무리 황당한 글이 있어도 그렇게 면전에다 대고 웃진 않거든.”

“글로 슬롯 거랑 몸으로 슬롯 건 차원이 다르지. 본능적이잖아. 몸으로 슬롯 걸 어떻게 참아.”


자동차 핸들을 잡은 다루가 의젓하게 말했다. 역시 옳은 말만 해야 살아남는 왕국에서 파견된 요원다운 반응이었다. 나는 기억했다. 모든 부끄러움과 잡념은 물에 뛰어들면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마치 물에 수치심과 쪽팔림을 녹이는 성분이 있는 건 아닌 지 의심이 될 정도다.) 결정적으로 슬롯장에서 숨을 쉬고 다리와 팔을 휘젓는 것만으로 벅차기에 생각이라는 걸 할 겨를이 없다. 남들이 웃든 울든 무슨 상관이야. 진짜 바보같은 건 웃음거리가 될까 봐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거다.


이건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 '잘 못 쓸까봐' 아예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썼다가 창피를 당할까봐, 자신이 본 멋진 글들과 비교가 되서.많은 작법 책에서 ‘일단 쓰라’고 독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쓰고 고치면 되니까. 나는 심리적 장벽을 낮추기 위해 '쓴다' 생각하지 말고 '갈겨라'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글을 썼다 지우거나 찢는 방법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나는 SNS나 글쓰기 플랫폼에 발행한 글들이 부끄러워져서 다음날 비공개하거나 지우기도 한다. 물론 책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팁 하나. 이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도 한데, 슬롯들은 타인의 일을 금방 잊는다는 걸 기억한다. 마치 수영장을 벗어나는 순간 아침에 무얼 먹을까 고민하고, 시큰거리는 무릎을 의식하며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수영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당연히 잊혀진다. 글도 마찬가지다. 명작으로 전해지거나, 폭로와 비밀이 가득한 문서가 아니라면, 세상의 숱한 글은 언젠가 망각이라는 무덤으로 향한다. 망각은 모두가 이르는 공평한 세계다. 이 진실이 나를 부끄러움에서 구한다. 글을 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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