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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샌즈 카지노 사이트일지 1편

페터 비에리, <자기 결정을 읽고 떠오른 장면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였다. 그날은 용돈 받는 날. 샌즈 카지노 사이트의 신발공장이 잘 돌았는지 아침 등굣길에 어머니가 2만 원을 쥐어 주었다. 나는 부자가 되었다. 버스정류장, 손에 있는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버스를 탔다. 지각할 분위기였다. 나는 학교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았다. 부산진역까지 갔다. 기차역 매표소에서 행선지를 살펴보았다. 아는 곳은 진주. 나는 진주행 비둘기호 기차표를 샀다. 기차를 탔다. 할머니들이 많았다.


“아이고. 학생 같은데, 샌즈 카지노 사이트 안 가고 어데가노?”

“할머니 댁에 갑니다.”


거짓말을 했다. 진주역에 내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진주중앙시장에 갔다. 시장을 한 바퀴 돌며 구석구석 구경했다. 학교에선 찾아볼 수 없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국밥집에 들어갔다. 국밥을 한 그릇 시켰고, 먹었다. 맛있었다. 다시 진주역으로 갔다. 부산 가는 기차표를 샀다. 샌즈 카지노 사이트 집으로 돌아왔다.


전날은 2학기 중간고사가 있었다. 나는 수학시험에 백지답안지를 냈다. 서울대 법대에 가야 한다고, 샌즈 카지노 사이트 소원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공부라고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시던 샌즈 카지노 사이트를 거역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자기 결정, 그것은 백지답안지 제출이었다.


여름 방학이면 나는 샌즈 카지노 사이트 신발공장에서 나이키 운동화 가피에 본드를 발랐다, 조그맣고 동그란 허리받침 없는 의자에 앉아서 본드를 바르다 보면 엉덩이에 땀띠가 났다. 더운 열기를 내뿜는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는 공장 안에는 실밥이 둥둥 떠다녔다. 샌즈 카지노 사이트는 자식들이 샌즈 카지노 사이트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사카 출신 미싱공 영자 씨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샌즈 카지노 사이트는 큰딸에 대한 기대가 컸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글짓기 상, 성적 상,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착한 어린이 상’까지 부모님께 안겨드렸다. 그것이 부모님의 기쁨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샌즈 카지노 사이트는 집 한쪽 벽을 상장으로 도배했다. 나는 부모님의 자랑이었고, 집안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커가면서 샌즈 카지노 사이트의 딸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대학입시에만 매달리는 학교가 싫었다. 게다가 서울대 법대에 갈 실력도 안 됐고, 법학을 전공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샌즈 카지노 사이트의 기대를 꺾어야 했다. 나는 백지 답안지를 냈다. 그리고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전날 친구에게 준 쪽지가 유서라며 샌즈 카지노 사이트는 발칵 뒤집혔고, 어머니는 딸을 찾아 태종대까지 뛰어갔다 오셨다.


“됐다. 마. 피곤할낀데 밥 묵고 쉬라.”


영자 씨는 집에 돌아온 내게 말했다. 2층 양옥집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공부가 소원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샌즈 카지노 사이트되기 시작했다. 취직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 결혼은 더더구나 그랬다. 등교거부를 한 그날은 자기 결정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다만 후회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이번 인생, 그것으로 족하다.


#피터 비에리, <자기 결정



* 2025년에는 브런치에 매일 글쓰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올리는 2025년 첫 글. 여러분, 새해 별일없이 심심하게잘 살아보아요. 지금, 이 순간을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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