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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 ‘사랑’의 슬롯 사이트

‘일상’적 슬롯 사이트와‘확장’적 슬롯 사이트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정신(지적)인 작업이 아니라 철저하게 운동(신체)적인 작업이라고 말했죠. 이는 외국어뿐만 아니라 모국어로 슬롯 사이트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즉, 모국어로 슬롯 사이트하는 상황 역시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운동’적인 겁니다. 여기서 먼저 모국어 슬롯 사이트의 종류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모국어 슬롯 사이트는 ‘일상’적 슬롯 사이트와 ‘확장’적 슬롯 사이트로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일상’적 슬롯 사이트는 ‘주의’ 없이도 나눌 수 있는 슬롯 사이트입니다. “밥 먹었어? 어” “돈 얼마 있어? 2만 원” 이런 슬롯 사이트들이죠. ‘확장’적 슬롯 사이트는 무엇일까요? 이는 지성적이든, 정서적이든 어떤 확장이 일어나는 슬롯 사이트입니다. 전혀 모르는 분야를 새롭게 배운다던가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서로의 감정들을 나누는 슬롯 사이트가 이 경우죠. ‘일상’적 슬롯 사이트에는 ‘정신’적인 작업으로 가능하지만, ‘확장’적 슬롯 사이트는 ‘운동’적 작업이 없다면 불가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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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슬롯 사이트는‘운동’적 작업이다.


진정한 슬롯 사이트는 ‘일상’적 슬롯 사이트라기보다 ‘확장’적 슬롯 사이트에 가깝죠. 그래서 모국어 슬롯 사이트 역시 ‘정신’적인 작업이 아니라 ‘운동’적인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타인의 말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질문해 보자.인상들이 그 상들을 찾으러 갈 것을 우리는 수동적으로 기다리는가?오히려 우리는 슬롯 사이트 상대자에 따라 달라지고,그가 하는 말,그가 표현하는 생각의 종류,특히 그의 문장의 일반적 운동에 따라 달라지는 어떤 성향 속에 자리 잡지 않는가?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확장’적 슬롯 사이트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때 “타인의 말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예술과 철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 봅시다.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의 말이 손쉽게 이해될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왜 좀처럼 그 친구의 말이 이해되지 않을까요? 그 친구의 말이 수동적으로 이해되기를 기다리기 때문이죠.


그 친구가 내뱉는 단어들(예컨대 ‘로스코’ ‘모네’ ‘미메시스’ ‘물자체’ ‘들뢰즈’ ‘벤야민’ 같은 말)이 촉발하는 저마다의 인상(이미지)들이 있겠죠. 그 인상들이 곧장 그 친구가 말하는 의미(상)들을 찾으러 갈 것이라고 수동적으로 기다릴 때, 그 친구의 말은 이해되지 않죠. 이렇게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해서는 ‘일상’적 슬롯 사이트는 가능할지 몰라도, ‘확장’적 슬롯 사이트 즉,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확장되는 깊은 수준의 슬롯 사이트는 불가능하겠죠.


연애할 때 싸우는 이유가 뭔가요? 슬롯 사이트가 안 되기 때문이잖아요. 왜 슬롯 사이트가 안 될까요? 서로 상대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능동적으로 ‘식별’하려 하지 않고, 그저 상대의 말들이 촉발하는 인상들이 그 상대가 말하려는 바를 찾으러 갈 것이라 여기고 수동적으로 기다리기 때문이죠. 그래서 서로가 말하려 바를 이해할 수 없는 거죠. 낯선 분야를 배우는 것이 어려운 이유 역시 마찬가지죠. 수동적으로 이해되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낯선 것을 잘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일상’적인 슬롯 사이트가 아닌, 지성적 확장(배움!) 혹은 정서적 교감(사랑!)을 위한 밀도 높은 슬롯 사이트는 언어의 종류와 상관없어요. 모국어(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배움’과 ‘사랑’의 슬롯 사이트가 가능한 게 아니에요. 멍때리고 슬롯 사이트하면 모국어로 슬롯 사이트한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배움’이나 ‘사랑’도 불가능할 겁니다. 오직 ‘주의’를 기울여 능동적으로 슬롯 사이트할 때, 비로소 ‘배움’과 ‘사랑’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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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슬롯 사이트 ‘운동 도식’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확장’적 슬롯 사이트를 가능하게 할 능동적인 슬롯 사이트는 어떤 양상일까요? 슬롯 사이트 상대자의 ‘운동 도식’에 따라 달라지는 말과 생각에 ‘주의’를 기울여 슬롯 사이트하려는 것이죠. 그때 우리는 그 친구가 말하려는 바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갈피를 잡게 되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운동 도식은 자신의 어조를 강조하면서,상대방(슬롯 사이트자)생각의 굴곡을 굽이굽이 따르면서 우리의 생각에 그 길을 보여준다.운동 도식은 그리로 몰려 들어가는 유동적 덩어리가 지향하는 형태를 자신의 형태에 의해 결정하는 빈 용기이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확장’적 슬롯 사이트는 ‘운동 도식’으로 가능하죠. ‘운동 도식’이 뭔가요? 무의미한 뭉텅이 지각을 유의미한 지각으로 전환하는 반복 운동이잖아요. 모르는 분야(예술·철학)를 배우거나 연인의 감정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슬롯 사이트로는 불가능하잖아요.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 매번 ‘주의’를 기울여 반복적으로 ‘운동’해야, 겨우 상대의 조금씩 이해하고 느끼게 되잖아요. 베르그손은 이 ‘운동 도식’은 “자신의 어조를 강조하면서”도 “상대방 생각의 굴곡을 굽이굽이 따르면서” 그의 생각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보여주게 된다고 말해요.


‘운동 도식’은 빈 용기에요. 의미를 알지 못한 채로 우리에게 몰려 들어오는 ‘유동적 덩어리(낯선 분야, 타인의 감정)’가 있다고 해봐요. 이는 당장 우리가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뿐,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형태)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운동 도식’은 그 유동적 덩어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주는 빈 용기 같은 거죠. 외국어로 비유하자면, 번역기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을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바꿔주는 번역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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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식별’과 사람의‘식별’


새로 출시된 스마트 폰(물질적 대상)을 ‘식별(이해)’하는 게 어려울까요? 아니면 한 사람을 ‘식별(이해)’하는 게 어려울까요? 한 사람을 ‘식별(이해)’하는 게 더 어렵죠. 왜 그럴까요? ‘8자 도식’을 잘 생각해 봐요. 지각하는 대상이 신상 스마트 폰이에요. 그러면 폐쇄 회로에서 꺼내야 하는 ‘기억’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어때요?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니야.” 어떤 사람이 내게 낯선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을 ‘식별’하는 건, 신상 스마트 폰을 ‘식별(이해)’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워요.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떠올려야 할 ‘기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즉 폐쇄 회로의 확장도 어렵고, 그 확장의 방향을 잡기도 어려운 거죠. 한 사람을 만나서 진짜 슬롯 사이트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런 (배우거나 사랑하는) ‘확장’적 슬롯 사이트는 괴로운 거예요. 계속 반복적으로 ‘운동’해야지만 겨우 슬롯 사이트할 수 있는 거니까요. 낯선 것을 배운다거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말을 무의미한 뭉텅이 지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에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의 말을 나의 빈 용기에 담아서, 어떻게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한 지각으로 바꿔내는 거예요. 그렇게 상대가 던진 말의 의미를 포착하려고 애를 쓰는 거죠.


연애를 처음 시작한다고 해봐요. 한국말을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마주하게 돼요. “날씨가 흐려서 미술관에 가고 싶다.” 이게 뭔 말이에요? 날씨가 흐린 것과 미술관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오늘은 힘들어서 혼자 있고 싶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죠. 힘들면 같이 있어야지 대체 왜 혼자 있고 싶다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잖아요. 이런 말들은 다 한국어지만, 무의미한 뭉텅이 소리로 들리는 경우잖아요. 이때 ‘운동 도식’을 통해 그 무의미한 뭉텅이 지각을 유의미한 지각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해요.



예술적‘식별’도‘신체 운동’이다.


이는 외국어나 모국어 즉, 언어적 ‘식별’만 그런 것이 아니죠. 음악이나 그림 같은 예술적 ‘식별’ 역시 마찬가지예요. 클래식 음악 들으면 졸리죠? 미술관 가면 지루하죠?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 보면 허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에요.


이 십대에 만났던 친구랑 청자 전시회를 간 적이 있었어요. “날씨가 흐려서 미술관에 가고 싶다”고 말한 그 친구예요. 지루해서 밥은 언제 먹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도자기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더니 우는 거예요. 당황해서 왜 우냐고 물어봤더니 “색이랑 선이 너무 아름다워서”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신이 좀 이상한 아이인 줄 알았어요. 그 아이랑 만나면서 알았어요.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은 허영에 빠진 것도 아니고 정신이 이상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 아이는 저한테는 없는 특정한 감각 운동 신경의 결이 나 있는 거였어요. 바로 그 감각 운동 신경의 차이가 종종 우리의 슬롯 사이트가 어긋났던 이유였죠. 또한 그것이 저는 청자의 색과 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고, 그 아이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던 거죠.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을 듣고 모네, 고흐, 피카소 그림을 본 이들은 그런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던 이와 달라요.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도, 세계를 느끼는 감성 구조도 모두 달라요. 그 친구들은 ‘정신’적으로 고상하거나 우아한 게 아니에요. 그냥 그 예술들을 온몸으로 느끼는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그런 예술들을 느낄 수 있는 ‘신체’가 만들어져 왔던 거죠.


낯선 것을 배우거나 누군가를 슬롯 사이트하거나 혹은 예술적 감수성을 갖추려면, ‘주의’를 기울여 신체적으로 반복 ‘운동’해야 해요.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도, 날씨가 흐린 날에 미술관에 가봐야 하는 거죠.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힘들 때 혼자 있게 해주어야 하는 거죠. 청자(그림)를 보고 마음이 일렁이는 경험하려면 미술관에 가봐야 하는 거죠. 그런 신체적 ‘운동’을 반복할 때, 비로소 조금씩 알게 될 거예요. ‘날씨가 흐려서 미술관에 가고 싶다’, ‘힘들 때는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의 그 미묘한 의미를. 청자(그림)의 선과 색이 전하는 그 미묘한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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