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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꽁 머니의 가스라이팅

-그것부터하지마.

-응? 누구야, 또?


0204다. 밤새 비바람에흔들린감나무열매들을 헤아린다.그리고슬롯 꽁 머니의새는직박구리.이른 아침부터감나무에직박구리가 도착한다. 참 부지런도 하다. 감이 익었나 확인하러 왔으려나. 초록을 보러 왔나. 갸우뚱거리는 작은 얼굴이 특히 매력적인 직박구리다, 라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데...


삑삑삑. 삐뽀삐뽀.


뭐, 뭐야? 무슨 소리야? 또 너야?

(영화<인사이드아웃2의 사춘기 알람 같다.)

아침부터 삐용삐용 심한알림을 켜고 내 머릿속을 강타하는 나의 연인...01


-그것부터 하지 마.

-슬롯 꽁 머니은 일 없어서 난 슬롯 꽁 머니부터 거의 주말인 셈인데?

-남들은 슬롯 꽁 머니도 빡세게 일해서 돈 버는데! 넌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난 가만히 있는 게 좋아.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기에는 딱 좋지.그렇게 되면 영원히 가만히 있을야 있겠지. 그걸 원해?

-뭐 이렇게 극단적이야?

-잔말 말고어서 베란다에서 나와. 지금 새들 귀여운 표정쳐다볼 시간이 어디 있어?

-슬롯 꽁 머니은 일찍 일어났는걸?

-그러니까 이 시간을 더 아껴 써야지!

-05

-'왜'가 어디 있니, 이 세상에? 자, 일할 준비해.

-응? 벌써? 슬롯 꽁 머니 일 안 나가는데도?

-강의 연습 해야지.넌 늘 슬롯 꽁 머니하잖아. 그러니까야지.

-그 일은 다음 주 화요일에나 있는데.



-어허, 애인 말 안 들을 거야?

(무슨 애인이 이래. 하나부터 열까지 잔소리.)

-너, 내 욕했지?

(귀신이다. 아, 진짜 귀신은 맞는 듯.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데 내 안에서 계속 들리는 유령 같은 슬롯 꽁 머니. 자꾸만 부피를 늘리는나의애인.)

-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기 싫은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03

-아, 아무튼 간에!!



난 하는 수 없이 줌을 켜고 아침부터 강의 연습을 한다.오늘은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나는 슬롯 꽁 머니과 열애 중이라서 독서나 명상이나 글쓰기를 포기하고 강의 연습부터 시작한다. 대체 애인(슬롯 꽁 머니)의 말이 뭐라고...



-그래서, 이젠 뭘 어떻게 해?

-강의 연습 끝났어?

-어.

-그럼이젠 15분 나노 단위로 하루 계획을 촘촘히 세워.

-왜?

-넌 날 좋아하니까(=슬롯 꽁 머니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해야 해.

(부인을 못 하겠네ㅡ_ㅡ)


-15분? 그렇게까지?

-그래야.. 계획대로 살 수 있고.그래야.... 내가 없어져.

-네가? 정말?

(우리,그럼헤어질 수 있어?)



나는 오늘도 슬롯 꽁 머니의 잔소리를 먹이 삼아 아침을 일으킨다. 계획에도 없던 '일'을 먼저 준비한다. 그렇게 애인을 조금 잠재운 후에는 15분 단위로 오늘 하루를 빈틈없이 계획해 본다. 하지만 슬롯 꽁 머니의 예언과 달리 계획대로 척척 되는 일이란 없다. 그저 '유령슬롯 꽁 머니증후군' 같은 내 증상이 잠시 잦아들이다.



오늘도 그렇게 슬롯 꽁 머니의 가스라이팅에 속아 억지로 나의 미래를슬롯 꽁 머니의 틀에가두고 만다.


이 녀석의 교묘한 지배는 슬롯 꽁 머니도 나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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