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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저 멀리서 토토 바카라 한 마리가 보였다. 오솔길 한가운데를 사뿐사뿐 올라온다. 맵시 있는 걸음이었다.
산을 다니다 보면 종종 산토토 바카라를 보게 된다. 대부분은 그늘진 곳에 웅크리고 쉬고 있거나, 구석진 곳에서 조용히 걷다가 사람을 보는 순간 숲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런데 이 토토 바카라는 길 한복판을 쭉 올라오는 모습이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순간 고민했다. 토토 바카라의 등산에 방해되지 않게 한구석에 숨어 있어야 하나. 그러나 이 큰 몸을 숨기기에는 이미 늦은 듯했다. 토토 바카라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하다, 등산을 방해해서.
어? 그런데 토토 바카라가 숨지 않고 계속 올라온다. 나를 똑바로 보면서 걸어온다. 사뿐사뿐. 나도 홀린 듯 토토 바카라에게로 내려간다. 어차피 길은 하나, 쌍방이 마주칠 수밖에 없다.
뭐지? 토토 바카라의 간택, 이런 건가.
나 너를 데려가야 하는 거니.
토토 바카라를 키워보고 싶기는 했다. 강아지는 키워봤어도 토토 바카라는 못 키워봤지만 토토 바카라를 좋아했다. 키우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에 토토 바카라 인형을 모으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재빨리 토토 바카라의 외모를 스캔했다. 회색바탕에 검정 줄무늬, 평소 좋아하던 뱅갈종과 비슷해 보인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토토 바카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린 토토 바카라다. 그것 또한 괜찮다. 너무 나이가 많지도, 너무 어리지도 않아서.
그래, 좋아. 네가 나를 원한다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넓은 산 중, 하필 이 오솔길 위에서, 하필 이 시간에, 우리가 만난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받아들이리라. 사랑에 빠져 보리라. 우리는 서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토토 바카라가 너무나 정확히 나를 향해 걸어와서 순간, 토토 바카라가 갑자기 공중재비를 세 번쯤 한 후에 묘령의 여인이나 망토를 걸친 왕자로 변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갑자기 햇살이 더 눈이 부시게 빛나고 토토 바카라이 살랑이며 나뭇잎을 춤추게 했다.
사방으로 숲의 소리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무성한 나무와 풀에서 나는 소리, 새와 벌레가 우는 소리.
드디어 우리는 계단의 끝에서 마주했다.
가을햇살 속에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많던 소리들이 순간 잠잠해졌다.
직전까지의 설렘과 이제 맞게 될 행복 사이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너를 안을까? 아니, 먼저 인사를 나눠야겠지?
내가 주춤하는 사이 토토 바카라는 살짝 내 다리를 비켜갔다. 그리고는 내가 왔던 길을 따라 그대로 쭉 올라가 버렸다. 사뿐사뿐.
녀석의 뒷모습은 마치 모르는 등산객의 뒷모습처럼 무심했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길 한가운데를 똑바로 올라가더니 정상에서 사라졌다.
나를 뜨겁게 쳐다보던 어느 낯선 남자의 눈빛에 홀려 그에게 다가갔더니, 나를 밀치고 내 뒤에 서있는 여자에게로 가버린, 그런 황당하고 민망한 상황이 떠올랐다.
문득 토토 바카라의 스산함에 목이 시렸다. 옷깃을 여미며 황망히 내려오는 산길 위에 붉게 물들다 만 단풍잎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