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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국이야 슬롯 꽁 머니야, 하나만 선택해.

샴페인 시의 친구 남편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우리 대화에 합류했다. 내 친구는 내 친구 답게 '얘가 죽어간다'며 내 역정을 들었고, 한참을 듣던 그는 나에게 무릎을 탁 칠 만한 조언을 해주었다.


남편분이 화술이 참 좋으신 것 같아요. 특히 벨뷰 님이 마음이 약한 걸 정확히 아셔서 그 부분을 공략하시니까... 개별 아젠다 별로 협의를 하면 남편 분 뜻대로 따라가다 계속 우울해지실 것 같아요. 그냥 둘 중 하나 선택하라고 하면 안돼요? 미국에 사는 거랑 슬롯 꽁 머니를 낳는 것 중에서?





세상에 마상에!

그렇게 좋은 방법이?



난 법학자이기 때문에 저렇게 다른 문제를 엮는 것은 '부당 결부 금지의 원칙'에 따라 옳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서로 완전히 무관한 문제가 아니다.


슬롯 꽁 머니를 낳을 때엔 친정 엄마가 가까운 곳에서 낳는 것이 최고다. 여동생은 이미 3년 전에 슬롯 꽁 머니를 낳아 육아 선배이기도 하다. 한국에 있는 내 직장은 출산휴가와육아휴직을 보장하는이다. 고령출산의 위험을 고려할 때 내가 잘 아는 환경에서 위험을 맞닥뜨리는 것이, 의료보험도 의사도 믿기 어려운 슬롯 꽁 머니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슬롯 꽁 머니가 정 낳고 싶다면 난 한국에서 낳아서 기르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하겠어.' 이렇게 말하는 게 전혀 무리일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임신 6개월이 된 친구 부부의 미래를 축복하고 시애틀에 돌아왔다. 남편의 반응이 너무 궁금해서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집에돌아오자마자남편을앉혀놓고내 입장을 설명했다.


복직을 결정하기까지 2개월 정도 남았는데, 만약 슬롯 꽁 머니를 정말 갖고 싶다면 난 한국에 가서 내 커리어를 되찾고 가족의 지원과 사랑을 받으면서 슬롯 꽁 머니를 낳고 싶다고. 미국에서 커리어를 새로 구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딱히 원하지도 않는 출산까지 하는너무나감정적부담이 크고, 슬롯 꽁 머니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남편은 예상한 대로매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 2년 간 힘들게 미국과 슬롯 꽁 머니를 둘 다 설득시켰는데, 갑자기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니 큰 걸 잃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남편: 아니야, 슬롯 꽁 머니는 그렇게 당장 원하는 게 아니라니까. 우리 나이 생각하면 자연적으로 임신이 될 확률이 낮으니까 그냥 시도만 해보자는 것 뿐이었잖아. 당장 2개월 후에 복직이라니, 그건 너무 갑작스러워.

: 슬롯 꽁 머니도 갑작스럽게 생길 수도 있어. 그러면 난 2년 정도는 임신, 출산, 몸조리 등으로 엄청 애매해져. 그리고 우는 아기를 두고 구직을 하는 것도 사실 잘 상상이 안돼. 자긴 다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난 그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게 너무 두려워.

남편: 그치만 당장 2개월 후 복직은.. 슬롯 꽁 머니가 생긴 것도 아닌데..

: 지금 시기를 놓치면 난 복직을 못할 가능성이 높아. 이미 우리 부처에서 3년씩이나휴직을 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했거든.

남편: 내가 당장 한국에 가면 우리는 소득이 반으로 줄게 될 거야. 내가 한 2년 정도만 시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스타트업도 자리를 잡고...

나:자기가 시간이 필요하면 한 동안은 한국, 슬롯 꽁 머니을 왔다갔다 해도 난 괜찮아. 그리고 소득이 줄어도 내가 벌테니까 그것도 괜찮아.

남편: 나 한국 가면 정말 불행해질 것 같아.. 자긴 복직하면 사람들 만나고 바빠질테고 난 방치될텐데.. 그러면 내 불행을 자기가 책임져줄거야?

나:내가 지금 미국에서 불행한 것도 자기가 책임져줄 수 없잖아. 자기 행복은 자기가 어느 정도 책임질 수밖에 없어. 당연히 나만 믿고 따라오는 거니까 내가 최대한 배려하고, 또 슬롯 꽁 머니 엄마가 되면 가정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애.

남편: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돼...?

: 응....




남편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이내 꽤 가벼워진 얼굴로 내게 답을 주었다. 왠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슬롯 꽁 머니지!





: 당... 당연히 슬롯 꽁 머니? 미국에 사는 게 그렇게 중요해?

남편: 응....

: 왜? 슬롯 꽁 머니보다 더??

남편: 슬롯 꽁 머니는 생길지 안생길지 모르는 거잖아. 그리고 난 슬롯 꽁 머니보다 우리의 삶이 더 소중해. 미국에서 하이킹 다니고 집에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난 이게 더 행복해. 그리고 자기가 졸업하고 취업해서 직장 동료가 생기면 분명히 지금보다 즐거워할거야!

나:그러면 이제부터 피임하고 슬롯 꽁 머니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거야?

남편: 응, 그렇게 할게.




슬롯 꽁 머니




생각보다 너무 흔쾌한(?) 답변에 다소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뭐...뭐지? 겨우 그 정도 마음으로 슬롯 꽁 머니를 갖자고 한 건가? 남편이 슬롯 꽁 머니의 모습을 그릴 때의 그 순수한 눈빛, 크나큰 행복, 그건 분명 진짜인 것 같았는데.


그래도 당장의 원거리 생활이나 장기적 한국행을 감수할 만큼 큰 소망은 아니었나보다.


난 왠지 남편이 슬롯 꽁 머니를 선택할 걸로 생각해서 미국 생활을 어떻게 정리할지, 돌아가서 학위논문을 어떻게 할지 이것 저것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복직을 하지 않는 것이 확정되면서 좀 슬픈 마음이 들었다.


다시 끝없는 전쟁과 자괴감으로의 복귀구나.





그 후 가끔씩 억울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당장 한국행과 슬롯 꽁 머니 중 하나 만 결정하라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자기에게 거주지와 슬롯 꽁 머니는 서로 다른 문제인데 하나를 억지로 희생하라고 하니까 너무 힘들었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약함'을 핑계로 들었다.


"미안해. 내가 어리고 팔팔해서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지금은 가족의 도움 없이, 육아휴직 같은 제도적 안전장치 없이 미국에서 덩그러니 슬롯 꽁 머니를 낳고 내 불확실한 미래를 계속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 너무 두려워..."


남편은 특유의 이상주의로 나를 북돋아 주려했다. "자기는 분명히 잘 될거야! 꿈꾸는 다락방을 생각해봐. 꿈을 향해 내려가야 한다니까. 난 몇 년 후의 자기 모습이 보여. AI 전문가로 인정 받으며 신나게 일하는 모습이...."



말리지 말자, 말려선 안 된다.



샴페인의 친구 남편의 말을 되뇌였다. 내 커리어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이상주의'와 '왜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려고 하느냐'고 내 열심DNA를 자극하는 남편. 슬롯 꽁 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귀여운 아기가 보고싶을 뿐이야...'라며 내 죄책감DNA를 자극하는 남편. 그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꿋꿋이 내 입장을 견지했다.


난 둘 다는 못해주니,둘 중 하나만택하라.




결국 남편은 몇 번의 투정 끝에 깨끗이 '슬롯 꽁 머니'을 택했다. 우리는 다시 피임을 시작했고, 난 하늘을 날 듯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에서 온 RA 오퍼를 받아들였다. 한국 정부에 복직할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몇 달 간 들고 있던 원고를 신속하게 마무리해서 최초로 법학 저널(law review)에 싣는 쾌거를 거두었다.


유학 생활은 여전히 팍팍했지만, 임신출산의 불확실성이 걷히고나니 그나마 견딜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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