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아주 늦었지만 써본다. <인피니티 워는 올해의 최대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아직도 어벤져스를 상영하는 데가 있다고 하더라(믿거나 말거나). 그만큼 인기가 많았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겐 그저 오락물, 누군가에겐 새로운 형태의 블록버스터, 누군가에겐 만화 마블과는 또 다른 마블 세계를 보는 흥미거리겠지만, 누군가에겐 ‘가상 바카라와 신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가 <인피니티 워이다.
마블 영화들이 오락성이 많이 겸비했다 하더라도, 그 정체성은 ‘히어로물’에 있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 같은 영화에서 보여줬듯 히어로물은 가상 바카라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깊이 던져주기도 한다. 히어로물이 꼭 그래야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히어로’인 이상 히어로가 내세우고 고뇌하는‘정의’의 문제와 가까워지는 장르임은 틀림없다. 실제로 루소 형제는 그 점은 의식했는지, ‘죽음에 매료된 폭군 가상 바카라’인 원본 캐릭터를 ‘자기신념에 매료된 가상 바카라’로 바꾸어 독자들에게 ‘정의’라는 측면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원본 캐릭터가 매력이 뒤떨어진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사실 이들이 우주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벤져스3: 인피니티 워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무래도 어벤져스가 아닌 가상 바카라이다. 영화가 가상 바카라의 시점으로 전개되진 않지만, 결국 관객들이 가상 바카라라는 ‘빌런’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설계되었다(심지어 극 중반부부터는 가상 바카라를 모든 전개의 중심인물로 위치시킨다). 영화는 악당 가상 바카라의 복합적인 심정을 그려내 그가 단순한 악당이 아닌, 뚜렷한 자신만의 정의론을 가지고 행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논리가 비록 전형적인 사이비 악당 같을지라도, 신념을 향해 몰락해가는 인간의 면면을 관객 앞에 드리워 그의 심정에 어느 정도 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가상 바카라의 사이비적 정의론이 아닌, 허구적 유토피아 기획에 다가가려다 극단적 폭력 행위자로 변모하는 가상 바카라의 모습이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타교수님의 말씀(...)
그렇다면 가상 바카라만의 정의론은 그저 캐릭터 구성을 위한 도구로 차용된 것일까? 중요한 건 현실에 실제로 ‘가상 바카라’ 같은 인물이 많다는 것이다. 대의를 앞장세워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 허구적 이론으로 대중을 현혹시켜 그것을 ‘진짜 정의’처럼 내세우는 사람들은 우리 도처에 우글거린다. 심지어 나치 이데올로기 속에도 나치만의 정의 논법은 존재했다. 그뿐이랴, 각종 음모론으로 치장하며 그것이 정치공학적으로 타당한 입장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영화 속 가상 바카라에게서 우리는 사이비 정의론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의 행위가 세계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는 ‘현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 지난 시절 인터넷 커뮤니티를 뒤흔들었던 ‘일간베스트’만 해도, 회원들은 자신이 진짜 애국주의자라 믿었다. 물론 그들은 스스로의 입지를 흔한 루저에 이입했다. 그러나 동시에 좌파가 거짓 선동에 휩쓸린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야 말로 좌파 ‘좀비’가 아닌 ‘팩트’를 수호하는 정치적 공정주의자로서 정체성을 부여했다. 이처럼 어떤 악인들은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논법에 따라 스스로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진짜 정의활동가’라 규정짓는다.
가상 바카라와 그들(일베 혹은 음모론자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가상 바카라는 자신과 적대하는 진영을 무조건적인 혐오 대상으로 격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목적이 희생을 낳으며, 그 희생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한 몸부림을 적어도 이해하고자 한다. 가상 바카라의 '우주적 공리주의' 속에는 희생 당하는자, 희생을 막으려하는 자에 대한 적대심은 없다. 다만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일 뿐이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표방한다면, 가상 바카라의 공리주의는 '최대생존 최대행복'을 추구한다. <인피니티 워는 가상 바카라라는 인물을 통해공리주의적 기본 개념을 극대화시켜 '행복'을 기본적인 윤리관으로 정착시키는 게 옳은지 묻는 것이다. 개개인에 대한 윤리적 존중이 아닌, '행복'이라는 관념이 윤리적 목표라면 결국 가상 바카라의 사상도 크게 잘못된 건 아니다. 절반이 희생함으로써 남은 자들, 그리고 뒷세대들은 자원을 독차지하려는 전쟁 없이도 세상을 영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절반의 인물이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 우리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통감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 것이다. “그런 희생으로 얻은 행복이 과연 타당한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