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사이트이 시작될 때 나는 어릴 적 TV에서 본 ‘티셔츠 많이 껴입기 기네스’에 도전하는 사람처럼 올해의 마지막 분기 안에 수행해야 할 많은 역할들을 겹겹이 입고 있었다. 일 년 농사의 수확철이 코앞인 팀의 리더, 치러낼 경조사들로 묵직한 가족 구성원, 정기 공연 초읽기에 들어간 밴드의 드러머, 월간 프로그램 기획이 필요한 동호회의 클럽장, 크레딧 만료 전 밀린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원 수강생, 달마다 찍힌 약속을 지켜야 할 강연자, 출간 논의를 시작한 책의 작가, 매주 내야 할 과제와 스케줄이 빼곡한 스터디의 조원, 연말 공개방송을 앞둔 팟캐스트의 공동 진행자, 전세 만기를 앞두고 시린 손발품을 팔아야 할 임차인, 그리고 어떤 옷을 입든 늘상 챙겨 입는 속옷처럼, 몸 곳곳 일상 곳곳을 챙기고 돌보는 자연인으로서의 나.
이렇게 많은 것들이 손을 잡고 몰려올 때면 늘 해오던 대로, 자그마한 포스트잇 하나당 하나의 ‘thing’을 적어 카테고리와 우선순위에 따라 오와 열을 맞춰 눈길이 가장 많이 닿는 벽에 붙여 두었다. 적어도 ‘할 게 (덩어리째) 너무 많다는 슬롯사이트’에 압도되지는 않으려는 방편인데, 워낙 그 가짓수가 많은 탓에 물리적인 여유가 줄어드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본격적인 러시가 시작됐던 11월 중순부터 평가철이 맞물린 12월 중순까지는 하루 단위로 서로 다른 데드라인들이 있었다. 늦은 밤 퇴근한 집의 온도가 점점 내려가는 게 느껴지는데, 이불을 가느라 줄여야 할 잠이 아쉬워 전기장판의 온도를 한껏 올리고 덜덜 떨며 잠드는 쪽을 택했다. 얄짤없던 날들이 하나하나 지나갔고, 벽을 메운 포스트잇 군단은 시간이 실어 간 낙엽과 함께 하나 둘 떨어져 듬성해졌다.
슬롯사이트 반환점에 이르러생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역할의 옷을 바꾸어 입으며 나는 죽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정확히는 곳곳에서 분노와 번뇌에 휩싸였지만 ‘그것들을 (이런 식으로) 해내야만 한다는 사실’로 인한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 새벽 택시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싸우고, 부실한 밥과 잠 대신 건강을 깎아 먹으며 버텼는가? 그렇지 않다. 정확히는 왕왕 새벽 택시를 탔고, 루틴이 무너졌지만 ‘싸우거나 버티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믿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뭐 이리 많은 걸 껴입었어, 과거의 나를 탓하는 대신 오늘의 역할을 한 겹 한 겹 성실히 벗어내는 데 집중했다.‘해냈다!’는 느낌표를 아끼고 하나하나의 마침표를 충실히 찍었다. 잘 챙겨 먹고 싶었고, 더 자고 싶었지만 지금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저 ‘지금은 이런 상황이구나’ 생각하고 넘겼다. 힘들었는데, 불행하지 않았다. 할 일이 많이 주어졌다는 것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에,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이불 커버는 언젠가 씌울 수 있을 테니까.
삶에 대한 기준이 세세하고 확고한 데 비해 스스로 ‘내 슬롯사이트 중세 시대’라 부를 만큼 녹록지 않았던 30대의 끝에서 마침내 득템한 것은 ‘수용’이라는 작은 지혜다. 이는 ‘내려놓음’ 혹은 ‘포기’와는 다르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과거, 타인, 타고난 것, 자연의 섭리—에 필요 이상으로 대거리하지 않고, 상황을 최대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내가 ‘어쩔 수 있을지도 모를’ 것들에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싣는 것. ‘성취의 가짓수’로 나를 점수 매기지 않고, 어떤 과정에서든 그로 인해 조금씩 더 지혜로워질 나를 기꺼워하는 것.
이제 곧 30대를 시작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서른?!’ 하며 말 그대로 별슬롯사이트이 다 들겠지. 마음을 다해 이 말을 전한다.나의 30대는 슬롯사이트 같았다고.해보고 싶은 것에 운이 허락하는 만큼 노력껏 도전해 보기도, 정말 간절했지만 입술을 피가 나게 물고 포기하기도, 깊고 오랜 박탈감과 좌절의 늪을 굴러보기도, 다시 있을까 싶을 만한 사랑을 받아 보기도, 저미는 가슴에 스무 살처럼 목놓아 울어 보기도, 이젠 꽤 노련해진 것들과 여전히 처음 해보는 것들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기도 하면서, 20대의 내가 그렸던 30대와는 전혀 다른, 가졌으리라 슬롯사이트한 것들은 거의 가지지 못했고 슬롯사이트지도 못했던 것들을 잔뜩 얻은, 상처와 사랑과 상실과 배움이 신나게 뒤섞인 시간이었다고.
류시화 작가는 ‘슬롯사이트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라고 썼다. "어차피 인생 계획대로 안 돼. 그러니까 맘대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계획대로 안 되고 맘 같지 않은 시간을 만나겠지만 그것대로 또 다른 선물 같은 삶일 거라고", 시인의 말을 빌어 말해 주고 싶다. 서른 즈음의 당신들에게, 그리고 마흔 즈음의 나에게.
왜 그동안 글이 뜸했나에 대한 변을 쓰려다, 올해의 회고와 새해를 맞는 마음까지 후루룩 한 글에 담아버렸다. 이러면 또 슬롯사이트지 못했던 괴상한 연말연시의 선물 같은 글이 아닌가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