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사이트》는 대프니 듀 모리에가 1938년에 발표한 걸작으로, 미스터리 고딕 소설로 분류되지만 그 장르적 경계를 넘나든다. 로맨스의 감성, 정체성 탐구의 깊이, 그리고 음산한 대저택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한 서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장르 구분을 넘어, 독자로 하여금 복작다단한 인간 심리와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냥 재미있게 소설을 읽었다면 장르가 무엇인지 고심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슬롯사이트》는 독자를 단숨에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하루 1시간 30분씩 투자하면 3일 만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도가 높다.
의미는 없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대체로 고딕 소설로 분류한다. 고딕 소설은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인기를 끈 장르로서 공포와 로맨스 그리고 초자연적인 요소가 배합된 이야기가 특징이다. 고딕 소설의 주요 특징은 음산한 배경과 초자연적인 요소의 사용이다. 또한 남녀의 로맨스는 빼놓을 수 없다. 남녀의 사랑을 다루지만 그 사랑의 밑바닥에는 기묘한 미스터리가 흐르는데, 그것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며 슬롯사이트이 미스터리한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긴장감과 흥분을 느낀다.
줄거리
《슬롯사이트》의 주인공에겐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밴호퍼 부인의 고용인으로서 1년에 90파운드를 받고 부인의 동반자, 그러니까 마치 귀부인의 시중을 드는 하녀처럼 살아간다. 남들의 사생활 이야기를 입담으로 살아가는 밴호퍼 부인의 시중을 들다, 우연히 맥심을 만나게 되고 결혼까지 이어지게 되는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맥심과 주인공은 '맨덜리'라는 대저택으로 이주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이 이어지리라 기대하지만, 밴호퍼 부인이 주인공에게 헤어지며 건넨 마지막 한 마디가 불안하게 다가온다.'어째 난 네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언젠가 가슴을 치며 후회할 실수 말이다.'
기묘하게도 주인공의 이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름이 없는 만큼 대저택의 하인들까지 주인공을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맨덜리에는 맥심의 전처인 슬롯사이트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다. 심지어 대저택의 집사인 댄버스 부인은 이미 사망한 슬롯사이트를 종교처럼 숭배하는 사람이다. 대저택과 산책길, 여울 위 작은 다리, 너른 정원, 철쭉 꽃, 심지어 한낮의 햇볕까지 전부 슬롯사이트의 소유인 것처럼 주인공은 느낀다. 모든 공간에 슬롯사이트의 강렬한 존재감이 스며 있다. 슬롯사이트가 쓰던 대저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쪽 방마저 새롭게 드윈터 부인이 된 주인공의 것이 아니다. 주인공은 이방인처럼 소외를 당하고 길을 잃고 유령처럼 여기저기를 방황할 뿐이다.
슬롯사이트, 슬롯사이트, 늘 슬롯사이트가 있다. 집 안을 걸을 때나, 어딘가에 앉을 때나,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꿈꿀 때조차도 슬롯사이트를 만나게 된다.
죽은 사람인 슬롯사이트는 산 사람인 주인공을 시종일관 괴롭힌다. 그렇다고 고딕 소설처럼 음산한 분위기에서 유령이 나타나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슬롯사이트라는 존재감에 주인공은 압도당하고 마는 것이다. 주인공은 맥심이 슬롯사이트를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오해하고, 자신이 슬롯사이트처럼 아름답지도 똑똑하지도 못하다는 사실 탓에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 사이에는 늘 슬롯사이트의 그림자가 있었소. 그놈의 그림자가 우리 둘을 갈라놓곤 했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가슴속에 늘 자리 잡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을 이렇게 꼭 껴안아줄 수 있었겠소? 죽기 전에 나를 바라보던 슬롯사이트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오. 그 비열한 미소가 또렷하오. 슬롯사이트는 이미 그때 이런 일을 예상했던 거요. 결국에는 자기가 이긴다는 걸 알고 있었소.
맨덜리라는 대저택의 음산한 기운, 그 대저택을 호위무사처럼 지키는 댄버스 부인, 그리고 이미 죽은 슬롯사이트라는 이름, 그 이름에 짓눌린 채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외롭게 분투하는 주인공의 몸부림, 그리고 미스터리한 사건들과 기막힌 반전이 소설《슬롯사이트》를 마치 대저택 맨덜리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슬롯사이트의 특징
듀 모리에는 등장인물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긴장을 세밀하게 묘사한다.'갑자기 저 앞쪽에 트인 공간이 보였다. 하늘도 보였다. 검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해지고 이름 모를 관목들이 사라졌다. 양쪽으로 피처럼 붉은 담, 머리 높이까지 오는 높은 담이 나타났다. 철쭉 꽃 사이에 파묻힌 형국이었다. 나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랐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검은 숲을 너무 오래 지나온 터라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뭇잎 하나, 잔가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찔하고 취해버릴 정도로 그렇게 선명한 빨간 꽃들만 끝없이 펼쳐졌다. 그런 철쭉은 난생처음이었다. (...) 드디어 저택이 멀지 않았다. 그제야 길이 넓어졌다. 양옆의 붉은 철쭉 담장은 여전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맨덜리였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맨덜리, 오래전 그림엽서에 있던 바로 그 맨덜리였다. 흠 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내 생각보다 훨씬 웅장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테라스는 정원을 향해 튀어나왔고 정원은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너른 돌계단 앞에 도착하자 창문을 통해 사람들이 잔뜩 모인 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묘사를 선호하거나, 묘사를 배우고 싶은 슬롯사이트가 지망생에게 좋은 교육 자료가 되는 것이 바로 슬롯사이트《슬롯사이트》다. 아래는 초반 맨덜리를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를 챗GPT에게 그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슬롯사이트》의 극적인 긴장감은 맥심과 주인공, 주인공과 댄버스 부인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더 크게 두드러진다. 댄버스 부인은 죽은 슬롯사이트에 충성하고 집착하는 인물이다. 집착 때문에 주인공에게 위해를 가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물론 그 장면이 사실인지 환상인지 경계를 흐릿하게 듀 모리에는 장치해놨다. 판단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인 것이다.
듀 모리에의 문체는 여성답게 예민하고 섬세하다. 장면의 묘사도 탁월하지만 심리적인 묘사도 뒤지지 않는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복잡한 감정을 다룬다. 등장인물의 대화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의 내면적 갈등을 깊게 관찰할 수 있다. 슬롯사이트이 바라는 삶은 사실 굉장히 소박하다.'우리 둘도 그 부부의 이웃이 되어 저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나절에 맥심은 대문간에서 직접 키운 키 큰 접시 꽃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나는 깔끔한 부엌을 바삐 오가며 저녁상을 차리는 것이다. 옷장 위에 놓인 시계는 째깍째깍 큰 소리를 낼 테고 찬장에는 반짝거리는 접시들이 놓여 있겠지. 저녁을 먹은 후 맥심은 난롯가에서 신문을 읽고 나는 바느질을 한다. 그런 삶은 특별히 요구하는 기준 따위 없이 그저 평화롭고 안정적이지 않을까?'하지만 이런 삶은 맨덜리에서 허락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댄버스 부인이 있고, 이미 죽어 버린 슬롯사이트가 맥심과 주인공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슬롯사이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항상 충돌한다. 사라진 존재인 슬롯사이트는 현재를 지배하고 주인공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슬롯사이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주인공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슬롯사이트라는 그늘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슬롯사이트는 대저택처럼 우울하게 주인공을 감싼다. 대체 슬롯사이트에겐 어떤 비밀이 감춰 있길 래, 맨덜리에 사는 모든 인물이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마치 추리소설처럼 후반부에 엄청난 반전으로 밝혀지게 된다.
애착 관계
주인공인 '나'는 맨덜리 대저택에서 슬롯사이트의 강렬한 존재감에 압도당한다. 나약하고 부족하며 어린 '나'는 슬롯사이트와 자신을 비교하며 맥심에게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이는 마치 아이가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불안증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존 보울비의 애착 이론과 연결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맥심과 슬롯사이트의 결혼은 표면적으로 완벽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불신과 배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애착 이론의 불안정한 애착 관계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 같다. 또한 슬롯사이트의 숭배자인 댄버스 부인은 그녀에게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이것은 댄버스 부인이 슬롯사이트와 강력한 애착 관계를 형성했음을 시사한다. 슬롯사이트가 죽음을 맞이하며 댄버스 부인은 주요 애착 관계의 분리에서 나타나는 분리 불안 증상을 보이게 된다.
렉싱턴의 유령과 비교
무라카미 하루키의 《렉싱턴의 유령》은 고딕 소설은 아니지만 대저택 특유의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맨덜리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렉싱턴의 한 저택에서 유령과 조우하게 된다. 물론 주인공이 실제로 유령을 목격한 건 아니다. 단지 소리로서 유령들이 파티를 하고 있다는 상상을 주인공과 독자가 함께 나누게 된다. 공포는 보여서 느끼는 게 아니다. 실체 없는 공포야말로 진정한 공포를 감각하게 만든다. 《렉싱턴의 유령》과 《슬롯사이트》는 실체 없는 유령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렉싱턴의 유령》과 《슬롯사이트》은 모두 과거의 영향과 정체성의 혼란, 심리적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를 표현한다. "슬롯사이트"는 고딕 소설의 전통을 따르며, 음산한 분위기와 미스터리한 서사 구조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반면,《렉싱턴의 유령》은 현대적인 배경에서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독자에게 심리적 공포를 전달한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두 작품이 다루는 주제의 보편성과 각 작가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독서란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연결하는데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이 슬롯사이트을 추천하는 이유
폭염 한가운데서 서늘한《슬롯사이트》를 읽는 것은 더위를 잠시 멈추게 만든다. 오싹한 분위기가 묘한 김장감이 더위를 잠시 잊게 만든다. 어딘가 빠져들 수 있다면 그 순간에는 괴로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듀 모리에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이끌어나간다. 슬롯사이트과 댄버스 부인의 관계는 특히 더 압도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슬롯사이트의 모험담도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의 모든 장면을 필사하고 싶을 지경이다. 별도로 사전을 만들어서 묘사와 비유를 기록해놓았다. 글쓰기 연습용으로도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의미가 있다.
기막힌 반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슬롯사이트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에 나는 또다시 놀라고 만다.
이 작품은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수차례 제작됐다. 넷플릭스에서 '슬롯사이트'를 검색하면 영화로 각색한 버전을 즐길 수 있다. 소설에서 묘사한 것들을 영화의 장면으로 만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