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일아침,부엌에서는따뜻한아침이 지어지고있었다. 부엌에밥냄새가 구수하게 퍼지고, 도도는 거실 저편에서첫 끼니를기다리며여러 가지 색블록을만지작 거리는 중이었다.호박 볶음에 넣을 호박을씻다 인기척이들려뒤를 휙 돌아보니블록을 가지고 놀던 도도가쪼르르 다가와있었다.무언가궁금한표정을 지어 보이며. 도도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후입을열었다.요즘질문이 많아진 도도가 한마디툭 내뱉는다.
"엄마, 슬롯 머신 어떻게 되는 거예요?"
도도가던진 질문을 듣는순간,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만족스러운대답이떠오르지 않았다.나는 음...이라고 뜸을 들이는 소리를 내며,머릿속으로아이가 던진질문에 대한 답을 고르기 시작했다.34개월 아이가갑자기던진질문에 어떤 대답이 적절할지고민하며.좀처럼 생각해도할 말이 없던내가다시도도에게물었다.
"도도야,근데그건 왜 궁금한 거니?"
"음.. 슬롯 머신, 나도 슬롯 머신가 되고 싶어서요." 도도가 눈을동그랗게 뜨며말했다.
슬롯 머신가 되고 싶다는이야기를도도에게 듣게 될 줄이야. 도도의 대답에나는 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슬롯 머신가 되고 싶은 이유가 궁금했다.
"도도야, 근데 왜 슬롯 머신가 되고 싶은 거야?"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도도에게물었다.
"슬롯 머신요.....멋지니까요." 도도가나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슬롯 머신 멋지다는 도도의이야기를 듣는순간 마음속이하얀구름 위를 걷는듯뭉클뭉클해졌다.도도는 슬롯 머신가 주는 보살핌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주는 슬롯 머신가 되고 싶다고말했다.그런슬롯 머신가멋져 보인다는 이야기에내가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그렇다. 도도의 이야기처럼 슬롯 머신라는 존재는참 멋진 사람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슬롯 머신가 되기 전에도 그리고 슬롯 머신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슬롯 머신라는 단어와슬롯 머신다는 단어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살아왔었던 때가 있었다.
슬롯 머신가 되기 전나는 좋은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에 성공해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을 슬롯 머신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돈을 많이 벌고 능력이 있어 성공 대로를 달리며 신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동경하기도 했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내가한 아이의 슬롯 머신가 되었다. 큰돈은 못 벌어도 직장에서 주는 월급을 알뜰이 모아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나는 연고 없는 곳에서 아기를 키우게 되었고, 결국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 우리 상황에 맞춰 고민고민한 끝에스스로내린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한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기를 돌보느라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동안 나만 한참 뒤처지게 될까 싶어전전긍긍하며 불안했던 시간들이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나의 선택이 어리석은 선택이었을까 하며 자책하기도 했다. 또슬롯 머신라는 이름표를 달고앞으로 끝없이 짊어지게 될상상 속짐들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져눈물지었던 그런 날도있었다. 슬롯 머신라는 이름이 주는 그 묵직함이 그저 버겁게만 느껴졌던 때였다.
그러던 중늦가을 어느 날의 일이다. 오후 4시쯤 초등학교 남자아이둘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그네를 타고 있었다.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였지만남자아이둘 다 덩치가 있었다. 씽씽 쌩쌩 서로 장난을 치며 그네와 그네를 부딪히기도 하고,누가 높이 타는가 시합도 하며 정신없이 그네 타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네 근처로 이제 걸음마에 재미를 붙인 듯 보이는 여자 아기 모습이 보였다. 여자 아기는 무엇이 궁금한지 그네 근처에서 신나게 걷다가 갑자기그네 앞쪽으로 힘차게 전진했다. 멀리서 도도와 놀다 그 모습을 발견했고, 그네가 왔다 갔다 하는 반경 안으로 들어선아기를 보며 나도 모르게 안돼!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여자 아기는 그네가 왔다 갔다 하는 반경 안으로 진입한 후였다. 여자 아기는 계속 힘차게 걸었고, 다행히첫 번째 그네가 씩 하고 지나간 후여자 아기가 지나가 다행히 아기는 그네에 부딪히지 않았다.하지만 문제는 옆에 있는 그네였다. 이미 첫 번째 그네를 지나친 여자 아기 쪽으로옆에 있던두 번째 그네가힘차게 다가오고 있었다.아찔한 순간이었다. 나는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볼 수가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눈을질끈감았다.
그때였다.누군가세차게 날아오는그네로 몸을 던졌다.쿵! 소리가 놀이터에 울려 퍼졌다. 그네로 몸을 던진 사람은 그네에 얼굴을세게맞았고, 엄청난 그네 속도에 밀려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두 번째 그네에 타고 있던 남자아이가 놀라서 급히 그네에서 내려왔고, 쓰러진 사람에게 괜찮으신지 물었다.살펴보니그네로 몸을 던진 사람은 여자 아기의 슬롯 머신였다. 여자아기 슬롯 머신가 아기가 다가오는 그네를 막기 위해급히몸을 던져 그네로 뛰어든 것이었다. 결국 아기 슬롯 머신힘차게 앞으로 향해오는그네에얼굴을강타당한 후쓰러졌고,다행히 여자 아기는슬롯 머신의 희생으로 무사했다.
아기 슬롯 머신 그네에 맞아벌게진 얼굴이 아플 것임에도그자리에서곧바로일어나더니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저 멀리로걸어가는여자아기에게급히 뛰어갔다.아기 슬롯 머신빨개진 볼에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여자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아기 슬롯 머신 아기를 안고급히놀이터를 떠났다.저 편으로 아기를 안고 사라지는 아기 슬롯 머신의 뒷모습을 보며 아기를 위해 그네에 몸을 던질 때 그 아기 슬롯 머신의 마음을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저 작은 아기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며 달려오는그네에 몸을 던진 아기 슬롯 머신의 마음이 생각났다. 아기를 향한 슬롯 머신의 마음과 아기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촉촉해져 왔다.
늦가을오후빨강단풍잎이 흩날리던 그날,놀이터에서 나는 그누구보다 멋진 사람을보았다.
그날일을 기억하고 보니,도도와엎치락뒤치락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3년에 가까운시간을함께지나쳐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이가 나를 변하게 한 것인지, 시간이 나를 변하게 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그시간 동안진정 멋진 사람이란 누구인지에 대한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어떤 이가짠하고 나타나슬롯 머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묻는다면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내 마음속에 따뜻하게 품고 있는 사랑을 세상 밖으로 꺼내와 누군가를 위해 따뜻하게 녹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진정 멋진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그런멋진엄마이고 싶다. 또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서와 같이내가 품는사랑이아이에게 무게로 느껴지지 않기를,집이, 우리의 품 안이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에세이 p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