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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단상

소극적 일상 03


1. 11월 중순이 넘어가도 춥지 않은 날들의 연속. 가을 재킷을 입고 출근했던 날 어둑한 퇴근길의 하늘을 보며 알았다. 계절의 온도는 변해도 계절의 시간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낮이 귀신같이 짧아졌고 밤이 길어졌다. 정시에 퇴근해도 야근을 한 것만 같은 찝찝한 날이 곧 다가올 것이다. 계절의 시간슬롯 꽁 머니.


2. 슬롯 꽁 머니 하루 전. 슬롯 꽁 머니지에서 들을 노래 재생목록 중 제일 첫 곡은 요아소비의 <아이돌. 사랑한다는 거짓말로 쌓는 커리어라니. 언제쯤 이 가사가 슬프지 않을까. 가급적 현지 노래로 차곡차곡 쌓은 재생목록도 준비 완료.


3. 11월 20일 아침. 인천공항이 혼잡해 활주로에서 한 시간 정도 대기하던 중, 이제 이륙까지 앞으로 10분이 남았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리말, 영어에 이은 일본어 방송까지 기장이 직접 진행했는데, 슬롯 꽁 머니;약 10분 뒤에 이륙합니다슬롯 꽁 머니;의 10분을 한국어 '십분'으로 발음한 실수에 웃었다.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앞뒷말 다 생략하고 대뜸 じゅっぷん(10분) 걸린다고 정정해 속으로 좀 더 웃었다. 아무렴. 3개 국어로 생방송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4. 엄마는 내가 세 살 때 나를 영재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때 이미 한글을 깨쳤기 때문이다. 주변 어른이 간판 하나를 가리키면 내가 그 상호명을 읽고, 그런 나를 보며 모두가 웃고, 다른 어른이 다른 간판을 가리키면 내가 그 상호명을 읽고, 모두가 나를 천재라고 불러주는 일이 엄마에겐 엄청난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게 좋았는지 재잘재잘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어댔다는 나. 전혀 기억조차 없는 어린 시절의 일화지만 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전철 내부에 가득한 광고와 안내문의 일본어들을 하나하나 읽어볼 생각에 무척 신났다. 방범카메라 작동 중 / 대망의 감사가격슬롯 꽁 머니. 이번 가을 겨울 첫 세일 유니클로 / 아이 키우기 응원 공간 / 우선 좌석 / 이 창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 부동산업을 개업하자 / 파워를 보존하는 활력 충전. 이만큼이나 읽을 수 있었다. 칭찬해 주는 다른 어른은 없지만 이미 어른이 된 내가 나를 칭찬한다. 그간 공부 열심히 했다, 잘했어.


5. 전철 의자에 앉아 무릎을 붙이고 발 끝을 안쪽슬롯 꽁 머니 향하게 한 남성 두 명을 보았다.


6. 호텔이 있는 지하철역을 가려고 환승역에서 내렸다. 캐리어를 든 관광객들의 숫자가 훅 줄고, 현지인의 숫자가 훅 늘었다. 갈아타야 할 전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백팩을 멘 사람들이 일제히 가방을 벗어 앞슬롯 꽁 머니 메거나 손슬롯 꽁 머니 들었다. 그 완벽한 군무에 속슬롯 꽁 머니 열심히 환호했다.


6. 전철 의자에 앉아 무릎을 붙이고 발 끝을 안쪽슬롯 꽁 머니 향하게 한 남성 한 명을 더 보았다.


7. 호텔의 일본인 직원이 내년 1월에 서울 슬롯 꽁 머니을 간다고, 추천해 줄 만한 곳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경복궁, 성수동, 한남동까지 말하니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음, 그게, 아무래도 저는 도쿄보다 서울을 더 모르는 지방 사람이라서요. 물론 마지막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8. <서진뚝배기 일본 팝업스토어 정보를 검색하는 일본인 여성 두 명과 본인의 이름인 아사히를 넣어 로제의 아파트를 부르는 일본인 가족 사이에 디즈니랜드 입장을 기다리는 한국인인 내가 있다.


9. 당일 예약이 가능한 긴자의 오마카세 식당 <스시 유에서 2시간이 넘는 동안 즐겁게 식사를 했다. 카운터 좌석이 총 6석밖에 안 되는 작은 가게라 각각 셰프님과 대화를 주고받다 자연스레 옆 사람과, 그러다 전체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 신기한 가게였다. 대화 주제는 고향과 결혼과 회사와 초밥을 넘나들다 곧잘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혼자 온 외국인인 나를 향하게 되었는데 도쿄에선 어디가 가장 좋냐는 말에 고민이 길어지자, 슬롯 꽁 머니;바로 여기 아닌가요?슬롯 꽁 머니;라고 대신 답한 손님을 향해 건배를 외쳤다.


10. 도쿄에서 어디가 제일 좋은가. 슬롯 꽁 머니하는 내내 고민하다 알았다. 이곳에서 듣기 위해 선곡해 온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는 그때의 동네. 그게 제일 좋다는 걸.


11. 삼각형 모양이 생각나는 걸음걸이. 거리를 걷다 보면 안짱다리로 걷는 여성들을 이따금 마주친다. 이 걸음걸이에 대해 로런 엘킨은 <도시를 걷는 슬롯 꽁 머니들에 이렇게 썼다.


다른 외국인들에게 여자아이들이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슬롯 꽁 머니;어릴 때부터 변태들이 치마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무릎을 모으라고 교육을 받아서 그래슬롯 꽁 머니;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중략) 귀여워 보이려고 그러는 거라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런 걸음걸이를 X-갸쿠(다리)라고 부른단다. (중략) 여자들이 도자기 인형처럼 레이스와 러플이 가득한 옷을 입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짱다리로 종종거리며 걷는다.


몇 해 전 내 뒤에서 걷던 여자 상사가 내 걸음이 팔자라며 보기와 다르게 걷는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내 발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우리 집에서 슬롯 꽁 머니;여자애가슬롯 꽁 머니; 이렇게 걸어야지, 슬롯 꽁 머니;여자애가슬롯 꽁 머니; 조신해야지, 슬롯 꽁 머니;여자애가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여자애가슬롯 꽁 머니;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걸. '보이는 게 나쁘다'라고 가르치는 환경에서 자란 결과물은 불편한 걸음걸이를 만들어내고 만다. 지금처럼 편하게 마음껏 걸어야지. 여자가 걷는 게 아니라 사람이 걷는다.


12. 부족한 돈, 끝이 잘린 종이 지도, 모자란 용기를 가지고 처음 여행을 왔던 그때의 도쿄. 촘촘하게 짜 온 계획은 늘 조금씩 어긋났고, 어긋나며 생긴 틈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랐던 어린 나는 가장 적은 비용슬롯 꽁 머니 가장 오래 도쿄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JR 야마노테센에 탑승했었다. 한 바퀴 빙 돌아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 어떤 마음을 가졌던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오랜만에 탄 야마노테센에서 그때의 여행이 조금은 그리운 것 같다는 무척 사치스러운 생각을 했다.


13. 우리 현실과 아주 동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우리 같지 않은 정도의 판타지가 좋아 남들이 여러 가지의 미드, 영드를 볼 때 나는 몇몇의 일드만을 반복해 봤었다. (지금도 다른 장르는 전혀 관심 없이 드라마만 찾아본다) 나만의 기준이 모여 지금의 슬롯 꽁 머니 이루었다. 이게 그랬던 슬롯 꽁 머니 거친 이러한 나다. 메이지 신궁 외원 은행나무 거리에서 <꽃보다 남자 츠쿠시와 루이를 떠올리며.


14. 만원의 전철에선 자꾸 나를 시험하게 된다. 만약 내가 내릴 역에서 지하철 문이 나와 가까운 쪽에서 열리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슬롯 꽁 머니. 그리고 보통 이런 시험을 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바라는 쪽의 문이 열리곤 한다. 운이 내게 말한다. 알아서 맞춰 줄 테니, 쓸데없는 시험에 마음 쓰지 말슬롯 꽁 머니.


15. 8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공항에 다다를 즈음 비행기 지연 안내 메시지를 받았다. 11월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폭설로 인천공항이 거의 마비 상태라는 걸 그제야 뉴스를 보고 알았다. 오후 1시 20분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4시간이 넘게 지연되어 출발했고, 인천공항 활주로에 도착해서도 약 2시간을 대기해 겨우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짐을 찾고 나오니 자정. 집까지 가는 별다른 수가 없어 공항 도착층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쪽잠을 잔 뒤 첫 차를 타고 내려왔다. 기상 이변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을 몸의 피로로 느낀 날. 여행에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만 이 정도의 '시간'만슬롯 꽁 머니 해결이 되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역시 아무래도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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