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내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어떤 합의를 본 건 아니다. 막연히 언젠가 낳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연애시절,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출산도 비출산도 당위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아내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떤 결정을 하게 된 동기나 계기가 하나 일 수 있어도 그 결정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힘은 한 가지 때문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결심하는 건 한 순간이어도 그 결심을 지속하는 것은 매 순간이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은 청소년 시절부터 막연히 가지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결혼과 출산이 내 삶과 거리를 좁혀오자 그 생각도 내게 바싹 다가왔다. 선명해진 생각의 테두리엔 우리 카지노가 보여준 삶의 태도가 가장 크고 깊게 새겨 있었다. 우리 카지노의 삶과 행적에 대해 상술할 생각은 없다. 이제는 노년 세대가 되어버린, 흔한 근대화 세대의 가(부)장일 뿐이었다. 생활비를 가져와 가족을 부양할 의지는 없지만 가부장의 권위는 지니고 싶던, 가족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했던, 그 시대에 비교적 흔한 남성이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 그런 남성들이 보편적인 우리 카지노 상(想)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대단히 특이한 유형 또한 아니었다.
우리 카지노는 내게 반면교사였다. 청소년 시절, 우리 카지노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우리 카지노의 즐거움이 어머니의 고통과 맞바꿔질 때마다, 우리 카지노가 우리 삶에 남긴 것이 헤어날 수 없는 구멍이라고 느낄 때마다, 나는 우리 카지노 같은 우리 카지노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 같은 우리 카지노'가 아니라, '우리 카지노'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같은 우리 카지노'가 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카지노'가 되지 않는 것이니까. 그건 실패할 수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몇 가지 부재를 얻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은 아이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여러 정체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었을, 우리 카지노로 호명되는 정체성과 세계가 영원히 내게 부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우리 카지노라는 정체성과 세계를 나는 경험할 수 없고, 나라는 존재가 또 다른 존재를 통해 확장되는 신비를 경험할 수 없다.
고등학생 때였다. 한 번은 우리 카지노가 화를 내며, "네가 어디서 나온 줄 알아!"라며 훈계하셨다. 앞뒤 사건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우리 카지노는 평소에 우리(나와 형)에게 별로 화내시지 않았다. 실은 우리에게 화 낼 겨를이 없으셨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아내와 자녀랑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지루하거나 불편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카지노는 가족구성원으로 마땅히 맺어야 할 행동 양식과 정서적 유대에 무심했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는 우리 카지노가 혼 낼 일도, 우리 카지노에게 혼 날 일도 없었다. 우리 카지노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얻은 것을 소중하게 여길 줄도 사랑할 줄도 몰랐다. 그저 자신만을 사랑했던 것일까.
'네가 어디서 나온 줄 알아'라는 질문 아닌 질문이 한동안 내게 떠나지 않았다. 아마 우리 카지노는 명확한 대답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았다. 당신의 유전자에서 내가 왔다고. 내 근원인 당신이기에 아무튼 자식인 넌 감사해야 마땅하다고. 어느 날, 다시 큰 '사고를 치고' 집에 들어온 우리 카지노에게 반감을 드러낸 십 대의 내게, 우리 카지노는 꼼짝할 수 없는 무기와 권위를 내세우고 싶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나라는 존재가 우리 카지노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감사라는 감정은 보통 선의, 호의, 배려, 희생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카지노가 나라는 존재를 위해 들인 품은 아주 '짧은 쾌감' 한 순간이었다. 감사하고 싶었지만, 한 개체의 짧은 쾌감에 왜 감사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로써 부재 한 가지가 더 생겼다. 감사할 수 있는 우리 카지노의 부재가.
사별 같은 근원적 부재는 대상을 그립게 만들지만,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인한 부재는 대상을 부인하게 만든다.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우리 카지노(와 그의 삶)에 대해 숙고하게 했다. 그렇게 쌓여가는 여러 겹의 생각이 '우리 카지노가 되는 일'을 더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근원적 부재가 아닌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우리 카지노의 존재가 나를 두렵게 했다. 혹시나 내가 나도 모르게, 우리 카지노 같은 우리 카지노가 되면 어쩌지, 그래서 내 아이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린 시절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느낀 혼돈과 절망과 고통을 나 아닌 다른 개체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우리 카지노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카지노가 된다는 것에 대해 어쩌면 우리 카지노가 된 이들보다 더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 카지노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03
두 가족은 시험 삼아 아이들을 친부모의 집에서 생활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료타의 유전 정보가 담겨 있는 류세이는 좋은 간식과 멋진 전망이 있는 집에서, 그리고 각종 생활 규칙은 있지만, 같이 놀아 줄 아빠와 동생은 없는 집에서 지내기가 힘들다. 결국 류세이는 가출을 하고 본래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엔 함께 놀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아빠와 동생이 있다. 케이타 역시 엄마 아빠가 없어 외롭지만 잘 놀아주는 친부 유다이와 식구들 때문에 조금씩 그 집에 적응해 간다. 료타는 가출한 친자 류세이를 다시 데려 오고 같이 놀아주기 위해 애쓰지만 류세이는 자신을 키워준 유다이의 집으로 다시 가고 싶다. 결국 료타와 미도리는 류세이를 유다이의 집에 보낸다. 그리고 다시 만난, 피는 전해주지 못했지만 6년간 함께 산 케이타를 데려오려고 한다. 하지만 상처받은 케이타는 료타를 보고 도망친다. 그리고 두 갈래 오솔길을 나란히 뛰던 아빠와 아들은 결국 한 길에서 만난다. 그 길 위에서 아빠는 울며 아이에게 한 번도 건네본 적 없는 사과와 진심 어린 포옹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의 책에서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며, 부모와 아이를 이어주는 것은 '피'가 아니라 '시간'이라고 말한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 카지노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카지노라는 자격은 유전 정보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에 대해 자신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내어 주었는가에 있다. 우리 카지노가 되는 일은 그런 것이다. 그 시간을 관통해야 아이에게 우리 카지노의 '피'가 아닌 우리 카지노의 '시간'이 흐르고, 그제야 그렇게 우리 카지노가 된다.
'우리 카지노'라는 이름은 쉽게 얻지 못한다. 눈매와 목소리와 생활 습관 몇 가지가 자녀에게 전해질 수 있어도, 그 몇 개의 유전형질로 우리 카지노라는 이름과 세상을 얻는 건 아니다. 우리 카지노라는 세상을 살며 우리 카지노는 우리 카지노 역할에 실수할 수 있고, 때로 우리 카지노라는 역할을 위해 옳지 못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카지노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제 몸과 연결된 아이를 고통스럽게 세상에 내어놓는 어머니는 사정이 또 다르다. 설사 자녀에게 무심한 어머니일지라도, 생물학적 '어미'는 최소한 우리를 열 달 동안 품고, 마침내 고통을 감내하며 출산한다. 우리 카지노에겐 그런 시간이 없다. 그래서 다른 시간이 요구된다. '피'는 '짧은 쾌락'으로 전해줄 수 있지만, 우리 카지노의 '시간'은 '긴 감당과 어떤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 카지노의 것이 전달된다면, 그건 따갑지만 포근했던 우리 카지노의 수염과 우리 카지노와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서다.
내 생물학적 우리 카지노에게는 자녀가 있지만 그는 막상 우리 카지노라는 세상에 거주해 본 경험이 없다. 나는 나대로 자녀가 없어서 우리 카지노라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각자 다른 길을 걸었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부재를 경험하며 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카지노와 같은 우리 카지노가 되지 않기로 했지만, 결국 나는 우리 카지노가 되지 못한 우리 카지노를 닮고만 셈이다. 다른 삶을 살아온 두 갈래 길 끝에서, 우리 카지노의 부재와 내 부재가 서글프게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