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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빈에게 쓰다

37 독자를 상대로 슬롯 머신 게임 쓰지 마라

기발함과 슬롯 머신 게임는 다른 것이다. 당신이 우리를 속이면 분노할 것이고, 우리가 그 책에서 느꼈던 점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만다.(p216)


재미를 위해 독자를 상대로 슬롯 머신 게임 부리는 작가는 없다. 그러나 어쩌면 작가는 그 슬롯 머신 게임 기발함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이 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벽에 있는 달팽이를 가지고 단편의 소설을 쓴 버지니아 울프처럼 마지막에 가서 속았다는 생각보다 그 기발함에 놀라게 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고 글의 힘이다.


마술이 과학의 세밀한 기술인줄 알면서도 요술이라 믿는 것처럼 슬롯 머신 게임가 만든 세상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소설 속 세상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오해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독자들은 속았다고 분노하기보다 기발한 창의력에 감탄한다.


한 문장에서 출발해서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간 그 가지에서 싹을 피워낸 수많은 단어들이 여러 구조를 만들어 이야기의 뼈대가 되고 그 뼈대가 쌓아 올린 얼개가 지어 내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기까지 삭막한 겨울의 시간을 얼마큼 견뎌야 하는지 여자는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 안에 있는 아픔을, 슬픔을, 기쁨을 쓰고 또 쓴다.


그리운 것이 생기면 그립다 쓰고, 뭘 봐도 감흥이 생기지 않는 감정의 무딤에 좌절할 때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쓰고, 이 상실감 앞에 결코 치유할 수 없는 허무에 빠져들 때 진한 술 한잔의 힘을 빌린다고 쓴다. 지겹도록 이어지는 삶 앞에 울고 싶을 때는 운다고 쓰고, 겨울 한 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휑한 마음이 느껴질 땐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다고 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플 땐 집에 있는 반찬을 다 때려 넣어 양푼에 비벼 우걱우걱 먹는다고 쓴다. 그렇게 쓰고 나면 재밌어진다. 슬롯 머신 게임가 아닌 진솔함으로 어느 누구가 아닌 자신에게 분노가 아닌 수용되는 느낌에 충만해진다.


글은 어느 누가 아닌 자신에게 재미있는 놀이의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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