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준범이 취업면접 때 사왔던 썬키스트 병음료 세트는 별로였어요. 한 병당 가격은 꽤 나가는데, 면접 보러 온 대표들이 긴장해서 반도 안마시고 남겨 놓기 일쑤고. 나중에 일일이 남은 음료 따라내고, 재활용하는 것도 일이더라고요."
"그럼 그냥 옥수수수염차나 포카리스웨트 2리터짜리 서너병이랑 종이컵 한 줄 살까요?"
"그래요. 급한 게 슬롯 꽁 머니 대표들이지, 인재들이 아니니까요. 너무 겉치레로 돈 쓰지 맙시다. 대신 엄마손파이랑 마가렛트 같은 상자과자들 좀 넉넉히 사오고요. 아차차, 카라멜 사탕은 됐어요. 준우 취직하는 슬롯 꽁 머니들은 IT 스타트업이라 대표들이 젊대. 당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 면접 때문에 너무 돈을 많이 쓰는 것도 좋게 보이진 않아요."
"이번엔 면접비 봉투가 몇 개려나... 준우 현금도 넉넉히 뽑아뒀대요?"
"준우가 현금 필요 없대요.면접 보고나서 바로 토스페이로 쏜대."
"준범이 때랑 다르네. 업종이 달라서 그런가."
"그리고 우리 셋째 신입 슬롯 꽁 머니로 면접 보면, 집에서 말고 대관을 해요.요 옆에 결혼식하고 돌잔치하는 건물있지요. 거기서 요즘은 면접 대관도 한대. 돈만 더 내면 면접자들 대기공간도 따로 주고, 사람 한 명 더 쓰면 순서대로 면접자 입장도 시켜주고. 전업 가정 채용 지원팀을 슬롯 꽁 머니 부모 중 한 사람이 해야 된다는 것도 옛말 됐대요. 외주를 줘야지."
초옥빌라 501호는 다음날 있을 면접 준비로 부산한 분위기였다.준우의 부모 세대의 경우, 입사하고자 하는 슬롯 꽁 머니에 이력서를 쓰고, 그 이력서가 간신히 통과되어야만 직접 찾아가 면접을 볼 기회가 주어졌었다. 슬롯 꽁 머니 몇 십군데를 돌고서야 간신히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완전히 바뀌었다. 출산률 저하로 인구가 급감한 것도 이유였지만, 노동을 제공하는 인재에 대한 가치가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존엄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슬롯 꽁 머니들은 발빠르게 채용문화를 바꿔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은 슬롯 꽁 머니 중 몇몇은 꽤 규모가 있는데도, 인재들로 대를 잇지 못하는 바람에 무너져버렸다. 초창기엔 과장급의 '인사담당자'들이 인재 면접을 위해 가정 방문을 했다. 그러나 각 슬롯 꽁 머니들의 인재 채용 경쟁이 치열해지자, '인사담당자'의 방문이 '성의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그에따라 대표가 직접 움직이는 수 밖에 없었다. 슬롯 꽁 머니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많은 수의 신입 인재가 필요한 경우엔 대표의 주요 업무가 '면접 외근'이 되었다. 면접 외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대표는 자신이 설립한 슬롯 꽁 머니더라도 가차없이 쫓겨났다.
"엄마, 아빠. 죄송한데 목소리 좀 낮춰주세요. 저 지금 서류 최종 검토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문제가 많네요. 요즘 슬롯 꽁 머니들에서 매출 자료를 일부러 부풀린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이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대표가 직접 슬롯 꽁 머니 소개서, 인재 채용 사유서를 작성하지 않은 성의 없는 곳들도 눈에 띄고요. 대행사 껴서 대필한 곳은 너무 티가 많이 나는데, 왜 이렇게 한심하게들 하는지..."
준우는 줄곧 예민한 상태였다. 2주 전 국내 최대 공채 사이트인 '삼고초려'에 '슬롯 꽁 머니 공개 채용' 공고를 올린 이후 그랬다. 첫 슬롯 꽁 머니는 한 인간의 인생과 경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준우의 비전이나 실력에 맞지 않는 수준 낮은 슬롯 꽁 머니들도 제안서를 무지막지하게 보내왔던 것이었다. 그는 자격미달인 슬롯 꽁 머니들을 걸러내는데만 꼬박 7시간을 써야했다. 그렇게 걸러내고도 백여 곳이 넘는 슬롯 꽁 머니가 준우의 수중에 남았다. 그는 꼼꼼하게 슬롯 꽁 머니가 보내온 매출 자료와 최근의 성과들을 살폈다. 특히 대표가 직접 작성해야만 하는, '인재 채용 사유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아무리 제안서 내용이 좋더라도 사유서 중오타가 두 개 이상 발견되면 그 또한 면접 대상에서 가차없이 제외됐다.
라벨이 제거된 생수 묶음을 조용히 뜯던 준우의 엄마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준우 아빠에게 말했다.
"당신, 며칠전에 슬롯 꽁 머니 대표 대신해서 면접 다녀왔다면서요?"
"어휴. 대표가 일부러 면접 일정 맞춰서 해외 출장을 도망치듯 가버린 탓에, 이사인 내가 급하게인재 모셔오려고 면접 다녀왔었죠. 대단한 인재이긴 했어요. 나 바로 앞 면접 슬롯 꽁 머니는 여든 된 회장이 직접 왔는데, 얼마나 압박 면접이었는지 우는 것 같았더라니까. 물론 나랑 눈 마주치고서, 안검하수라 눈물이 자주 흐른다고 둘러대긴했지만 분명히 압박 면접 때문이었어."
"그래서, 슬롯 꽁 머니는 모셔왔어요?"
"그럴리가. 일단 대표가 아니라 이사가 왔다는 데서 마이너스. 게다가 압박 면접에 준비도 안되어 있던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뭐였겠어요. 슬롯 꽁 머니의 취미, 특기까지는 어찌어찌 외워서 갔는데... 시력을 홀랑 잊어버린 거예요. 대충 0.8이나 0.9 정도로 말했더니, 바로 '수고하셨습니다' 하더라고. 대기실로 나와서 물어보니까, 알고보니 그 슬롯 꽁 머니 양쪽 눈이 모두 2.0이래. 일부러 도수가 없는 안경을 끼는 걸 선호한다고."
"날이 갈수록 슬롯 꽁 머니 모셔오기가 쉽지 않네요."
준우 엄마는 프린터한 종이 몇 장을 꺼내들었다.
"당신 이제 마트 갈거니까, 가는 길에 이걸 좀 잘 보이게 붙여둬요."
스카치 테이프를 챙겨든 준우 아빠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종이 위엔 커다랗고 빨간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면접 가는길'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는 이 화살표만 봐도 지난 압박 면접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골목이 시작되는 담벼락에 화살표가 인쇄된 종이를 붙이는데, 한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면접 있나봐요."
"아, 예."
준우 아빠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면접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인재를 채용하지 못한 슬롯 꽁 머니들 혹은 헤드헌터들이 집적거리곤 했다. 남자는 준우 아빠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얼쩡거리다, 결국 준우 아빠의 바지 주머니에 명함 한장을 꽂아넣고 달아나듯 떠났다. 슬롯 꽁 머니에서 이사인 준우 아빠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머니에 넣어둔 명함을 보지도 않고 구겨 바닥에 던져버렸다. 바닥엔 온갖 전자 명함들이 구겨지거나 밟힌 자국이 있는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각종 슬롯 꽁 머니들의 제안서를 열람할 수 있는 전자 명함이었다.
날이 밝았다. 준우는 늦게 잠이 들었는지, 면접 시간이 다 되어서야 느즈막히 일어났다. 전업 가정 채용 지원팀의 팀장인 준우 엄마는 준우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첫 번째 면접 슬롯 꽁 머니가 30분 전에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 이르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열의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네요.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슬롯 꽁 머니의 브랜드 컬러가 그린인 IT 슬롯 꽁 머니였다. 대표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형광 녹색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창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에 그의 옷 색깔이 더 번뜩이는 듯 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준우를 향해, 방아깨비 같은 슬롯 꽁 머니 대표가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소리치듯 얘기했다.
"꿈을 그린(green) 슬롯 꽁 머니, 초록애입니다!"
준우가 그리 주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슬롯 꽁 머니였다. 준우는 슬롯 꽁 머니의 제안서를 뒤적이며, 그에게 1분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초소형 빔프로젝터와 태블릿PC를 꺼내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화면에 띄우기 위해 꾸물거렸다. 준우는 그저 슬롯 꽁 머니의 서류를 간단히 훑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데, 그가 꽤 오랜 시간을 쓰는 바람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냥 말로 하세요. 1분 자기소개서 모릅니까?"
"다른 슬롯 꽁 머니와 차별화를 위해, 인재님을 위해 밤새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는데요... 그게, 배터리가..."
"슬롯 꽁 머니 채용 후에도 이러실겁니까?"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잘봤습니다. 그냥 나가셔도 좋습니다."
대표는 거의 울먹이는 듯 했다. 준우의 바지가랑이라도 잡으려는 때, 방문이 열리며 준우 엄마이자 전업 가정 채용 지원팀 팀장이 들어와 그를 문 밖으로 끌어냈다. 1분 뒤 다음 슬롯 꽁 머니 대표가 들어왔다. 그의 복장은 과하지 않은 정장 차림이었다. 준우는 지난 밤 서류를 검토하며, 이 슬롯 꽁 머니와 관련해 자신이 메모해둔 것을 발견했다. 준우는 역시 슬롯 꽁 머니 대표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류만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삼십대네. 젊은데, 슬롯 꽁 머니 끝까지 책임질 자신 있어요?"
"당연합니다!"
"요즘 작은 슬롯 꽁 머니 대표들은 끈기가 없잖아요. 어느 정도 성장했다 싶으면 팔아버리고, 도망가다시피 하는데. 인재 입장에선 그런 게 보기가 좋지 않아요."
"그럴 리 없습니다!"
"좀 체격이 커보이는데, 건강 관리는 해요? 보기엔 안해보이는 것 같은데..."
"운동 좋아합니다! 요즘 큰 투자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좀 부은겁니다."
"대표는 슬롯 꽁 머니의 얼굴인데, 이건 큰 마이너스예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요?"
준우의 압박 면접이 이어졌다. 거실에 마련된 임시 대기실에, 차례를 기다리는 대표들이 긴장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그 중 몇몇은 이번 슬롯 꽁 머니 채용을 실패하면, 대표직이 위태로운 사람도 있었다. 오전 반차를 내어두고 면접 일을 돕던 준우 아빠가, 부엌 벽에 기대고 있던 준우 엄마에게 살며시 다가가 속삭였다.
"내가 준우 슬롯 꽁 머니러 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네요."
"인재를 모시고 싶은 건 슬롯 꽁 머니니까, 이정도는 감수해야지요."
현관문이 열리며,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대표 하나가 또 들어왔다. 준우 엄마는 거실에 놓인 의자 중 하나에 그를 안내했다. 오늘 면접은 늦은 밤까지 예정돼 있었다. 준우의 체력이 모자라면, 그 마저도 내일로 미뤄질 일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