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째 슬롯 꽁 머니을 도둑 맞은 것 같다. '도둑 맞은 슬롯 꽁 머니'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있던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가보다. 나름대로 도둑 맞은 슬롯 꽁 머니이라도 써보려 대응 하고 있다. 원랜 30분에서 1시간 정도 한 책을 읽었는데 이제는 15분 정도 읽으면 책을 바꾼다. 몇달 전부터 과학 책인 '엔드 오브 타임'을 다시 읽고 있는데 영 진도가 안나가 편하게 읽히는 에세이로 바꿨다. 그마저도 힘들땐 브런치의 글을 더 많이 읽는다. 읽는 시간은 20년도 넘게 나를 나답게 한 시간이니까 애써서 지켜보고 있다.
멍 때리는 시간을 늘렸다. 쉴 때는 언제나 핸드폰을 들고 숏츠를 보거나 유투브나 인스타를 봤는데 일부러 핸드폰을 멀리 두고 눕거나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그냥 멍하니 쉰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서 갈 때도 핸드폰은 가방 깊숙이 넣어둔다. 멍하니 쉬는 시간들을 늘리다보면 슬롯 꽁 머니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다.
과제를 할 때도 핸드폰을 멀리 두려고 한다. 사실 외국에서 공부를 하며 영어 실력이 쑥쑬 늘 줄 알았는데 휴대폰으로 읽어야 할 논문을 찍으면 번역 앱이 바로 번역해주니까 자꾸만 사진을 찍었다. 영어로 된 글을 많이 읽는건 머리 아프니까 자꾸만 과학기술의 진보를 누렸다. 그런데 과제를 할 때는 핸드폰으로 찍고 작은 화면에 번역된 한국어를 읽고 다음 페이지를 또 사진 찍고 번역기 돌려 또 읽는 행동이 지속되다보니 슬롯 꽁 머니은 저 멀리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런 내가 질 좋은 집중을 할 때가 있다. 슬롯 꽁 머니 그릴 때이다. 슬롯 꽁 머니을 그리려고 준비할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지만 일단 그리기 시작하면 슬롯 꽁 머니외에는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는다. 분위기 좋게 배경 음악을 틀어놓는데 무슨 음악이 나오고 있는지 인식이 되질 않는다. 핸드폰으로 그릴 사진을 켜 놓고 있어서 핸드폰을 만지는 일도 없다. 한 자세로 슬롯 꽁 머니을 그리다가 완성하고 나면 목이나 어깨가 조금 뻐근하다. 집중하느라 자세가 나쁜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슬롯 꽁 머니 그리는 시간이 아주 좋으냐 하면 그런건 아니지만, 요즘처럼 어느 것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내게 이런 시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
이번주에는 투시나 원근을 생각하며 건물을 그려보는 주였다. 유투브로 1점 소실법과 2점 소실법에 대해 공부하고 느낌을 익혔다.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고 주로 슬롯 꽁 머니을 그리는데 밴쿠버에서 지내며 거의 자연만 찍어놔서 건물이 별로 없었다. 키 큰 나무, 너른 잔디밭, 넓은 하늘과 바다 사진들 틈에서 단순한 건물을 찍어둔 것이 없어 유투브 강의에서 예제로 보여준 현대적인 스타일의 주택을 따라 그렸다. 소실점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강의를 듣고 생각하면서 그리니 좀 더 건물처럼 슬롯 꽁 머니이 그려졌다. 핸드폰과 유투브가 내 집중력은 빼앗아가지만 이렇게 손쉽게 강의를 들을 땐 좋기도 하다.
다른 날에는 지난 겨울 산책을 나갔을 때 보았던 슬롯 꽁 머니 같은 주택을 그렸다. 12월 내내 산책을 할 때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하나 둘씩 늘어나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던 집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2개의 소실점이 보였고, 나름대로 비례를 맞춰서 아늑한 집을 그릴 수 있었다. 주택 앞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그려넣는 것은 특히나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렸던 것 같다.
1점 투시도는 거리나 골목, 가로수길, 기찻길 같은 풍경을 그릴 때 많이 쓴다. 사진첩을 한참 뒤돌아가서 구경하다가 2022년 10월에 갔던 퀘벡의 거리에서 눈이 머물렀다. 계단 아래로 펼쳐지는 거리인데 드라마 도깨비의 문이 있는 곳이다.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밝혀진 조명이 낭만적인 곳이었다. 사진을 보자 여행할 때 그 거리를 내려다보며 한껏 행복했던 기분이 떠올랐다. 그 때의 기분을 다시 꺼내보려고 슬롯 꽁 머니을 그리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 서서 양 쪽으로 건물이 늘어서있는 거리를 그리는 것은 조금 어려웠지만 투시법을 생각하면서 나름 느낌을 내볼만 했다. 소실점을 생각하지 않고 풍경을 그릴 땐 내 눈에 들어오는대로 슬롯 꽁 머니에 옮겨보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잘 되지는 않았다. 어반스케치를 잘 하고 싶으면 이런 지식들을 잘 쌓아서 연습해야된다는걸 깨달았다.
10년 넘게 슬롯 꽁 머니을 그렸지만 1년에 대여섯번 정도 그려와서 느릿 느릿 실력이 쌓여왔는데 요즈음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배우고 그리니 확실히 슬롯 꽁 머니이 빨리 느는 것 같다. 뭐든 이렇게 성실하게 하면 좋겠지만 마음이 동해야만 할 수 있는 일. 지금 내가 슬롯 꽁 머니을 제대로 그리고 싶어졌다는 것에 기뻐하며 하루 하루를 쌓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