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슬롯과 함께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사람의 열정(熱情,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요즘의 나는 이 질문에 붙잡혀 있다. 입대 후 어떻게든 끌어모으려 해도 좀처럼 모아지지 않던 그것을 넘치도록 가지고 계신 분을 만났다. 갓 임관한 소위도 아니고 군 생활 10년 차에 들어선 장교가 처음마음과 태도를간직하고 있음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뜨거운 마음에 노련함까지 덧붙은 그 열정은 쉽게 볼 수 없는 빛깔을 띠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군 생활을 장렬하게 불사르고 있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여자 슬롯이 오신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살짝) 걱정했다. 우선 그와의 케미가 걱정되었다. 까칠하신 분이면 어떡할까. 나랑 맞지 않는 분이면 어떡하지. 심지어 나 같은 분이어도 별로일 것 같은데... (그게 가장 별로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의 사각지대를 찾아내서 혼내시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남자 슬롯도 나를 혼내긴 했지만, 그분이 미처 못 보거나 못 혼낸 부분들을 가차 없이찾아내 지적하시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 등등에 사로잡혀 약간의 걱정과 약간의 기대로 나는 그분을 기다렸다.
마침내 슬롯이 내 앞에 나타나셨다. 슬롯을 보는순간 깨달았다. 모든 것은 기우(杞憂)였음을. 나는 딱 나의 그릇의 크기만큼 그를 상상하고 있었다.슬롯은 나와 비슷하지조차 않으셨고, 감히 비슷할 수도 없었고, 이제껏 봐온 여자 군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유형의 캐릭터. 천사가 형상화된 유형이라 해야 할까. 시기 질투 견제 험담 어느 것 하나 슬롯과 가까운 것이 없고 응원 격려 사랑 애정 밝음의 온갖 좋은 기운을 품고 계신 분. 야전생활 10년 차 장교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포스. 말하지 않아도 그릇의 크기가 느껴졌다. 100여 명 되는 중대원들과 중대 간부들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가진 분임을.
우리는 어떤 시각에 비춰 나와 관계하는 타인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마 스스로의인식과 스스로선호하는 취향에 따라 타인을 바라보지 않을까. 슬롯을 통해 느낀다. 나는 그냥 나 자체로 슬롯께 받아들여지고 있음을.내가 소대장으로서 임무 수행능력이 얼마나 뛰어나고 어떤 사람인지 와 관계없이 그냥 나 자체로. 내가 직속 후배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직속 후배와 사이 안 좋은 경우도 많다.)그에게 '나'는 단지 유일한 '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동일한 시각으로 중대원들과 다른 간부들도그 자체로인정하고 품는 그릇을 가졌다. 그게 그의 리더십의 빛깔이다. 그래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그분이 슬롯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보좌해 드리고 싶다. 그 슬롯이자발적으로 생겨난다. 그의 리더십의 유형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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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보며 생각한다. 열정은 끌어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무엇으로 그 졍을 태울 것인가는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리라고. 나는 과연 알고 있는가. 나의 열정에 무엇으로 불을 붙일 수 있을지. 그저 나의 열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생각하며, 어디선가 그것을 끌어오기를 나에게 열정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던 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나의 열정이 향하는 곳은 아직 모르지만 슬롯을 보니 알겠다. 슬롯의 열정은 '사랑'에 있다는 것을. 삶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잃지 않는 한 슬롯 삶의 열정은 멈추지 않을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현명한 슬롯은 아마 알고 계실 것이다. 스스로의 열정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하루는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날 그분은 말씀셨다. 당신의 이상형은 이타적인 남자라고.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뜻을 되물었다. 사는 동안 그런 분은 처음 보았다. 이상형이 어떠한 조건이 아닐 수는 있지만, 성품 중에서도 이타적인 성품이라니. 과연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일까.돈은 본인이 벌면 되니 전혀 상관없고,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그자체로 존경스러울 것 같다는 답변에서 내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분임을 다시 깨닫는다.
슬롯의 등장으로 바라던 바 마침내 나는 친구가 생겼다. 존경하고 따를만한 친구. 재능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그분은 다른 이에게 긍정의 기운을 불어넣는데 천부적인재능이 있다. 고민이 있을 때 슬롯께 상담하면 힘을 얻지 못하는 때가 없다.상대의장점을낱낱이파악해힘을실어주는슬롯과의대화를 마칠 즈음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커져 슬롯에큰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나의 군 생활은 슬롯 등장의 전과 후로 나뉠 것 같은 예감이다.
이토록 뜨거운분이 전역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는데 지켜보니 알겠다. 그분은 전역을 앞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불사르고 계신 게 아니라 모든 것을 후회 없이 불살랐기 때문에 전역을 택하셨겠다는 느낌이. 미련 없이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군'을 위해서라면 슬롯이 남으면 좋겠지만, 슬롯을 위해 나는 그분의 전역을 응원한다.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떠나시기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0개월. 나의 최선으로 그를 보좌해 군에서의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자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예감한다. 슬롯과의 시한부의 우정은 군을 넘어 계속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