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 슬롯 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메리 마이 라이프

라라크루 수요질문. 파라오 슬롯의 추억 & 파라오 슬롯의 계획.

나는 종교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연히 우리 집에서 파라오 슬롯는 부처님 오신 날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어린 나와 동생들은 여타의 공휴일보다 더 간절히 그날을 기다렸다. 이유는 당연히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에 있었다. 파라오 슬롯가 다가올수록 과연 올해는 어떤 선물을 받을까 잔뜩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정작 받았던 선물은 언제나 노트나 색연필 같은 학용품이었다. 그래도 그날이 가진 마법에 흠뻑 취해 종일 들뜬 기분으로 지냈다.


파라오 슬롯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활동은 없었다. 아빠가 치킨을 시켜주면 그게 최고인 줄 알았다. 밤이 되면 나와 동생들은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TV에서 나오는 영화는 그 시절 우리의 최고 유희였다. ‘나 홀로 집에’나 ‘34번가의 기적’ 같은 감동을 주는 영화는 몇 년을 반복해서 봐도 질리지 않았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다른 채널에서는 ‘다이하드’ 같은 액션파라오 슬롯가약간의 시간차를 두고방영되었다. '다이하드'는 부모님이 좋아하던 파라오 슬롯였기에 우린 보던 파라오 슬롯가 끝나면 바로 러닝셔츠만 입고 악당과 싸우는 브루스 윌리스를 보러 채널을 넘어갔다.


그밖에 기억에 남는 영화로는 ‘파라오 슬롯 악몽’이란 제목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있다. 그 영화는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팀 버튼 감독이 제작했기에 더 마음이 갔다. 다소 괴상하고 엉뚱한 캐릭터의 움직임에 연신 감탄을 연발했으나 정작 나 이외엔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기에 되레 더 오래 기억하는 듯하다.

그 모든 파라오 슬롯를 볼 때마다 같은 포인트에서 웃고 같은 포인트에서 울었다. 줄거리는 달랐지만, 결말은 언제나 비슷했다. 주인공은 온갖 역경을 딛고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파라오 슬롯에 푹 빠질 때면 스크린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해피엔딩 파라오 슬롯를 좋아하기 시작한 시점은 생각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방송국에서는 파라오 슬롯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면 엔딩 크레딧 없이 바로 광고를 내보냈다. 어릴 적 친구들과 극장에 가서 파라오 슬롯를 볼 때마다 마지막 장면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건 그때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보았던 한 드라마가 나의 습관을 바꾸었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극장에서 파라오 슬롯를 볼 때면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는 대사를 했다. 그의 대사가 가슴 깊이 박혔다. 이후 파라오 슬롯를 제작한 이들의 명단을 보는 건 관객이 가져야 할 예의라는 인식이 생겼다. 지금도 극장에 가면 사람들이 다 나가더라도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괜스레 파라오 슬롯가 되면 하염없이 눈을 기다렸다. 파라오 슬롯에는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야 더 파라오 슬롯답다고 믿었다. 실제로 눈이 내리는 날이면 동생들과 밖으로 뛰어나가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눈을 뭉치다가 잘 안되면 장갑을 벗어 던졌다. 손의 열기에 표면이 녹아내린 눈송이는 훨씬 더 단단하게 뭉쳐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손이 시리다 못해 나중에는 감각까지 무뎌졌지만 노는 게 좋아 엄마가 우리를 찾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았다.


눈을 기다렸던 아이는 어느덧 결혼해서자기처럼 파라오 슬롯를 목매어 기다리는아이를 낳았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파라오 슬롯의 특별함이 점점 바래진다. 단지 바쁜 연말에 집에서 숨 돌릴 수 있는 하루를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보다 중요한 건 아직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딸의 마음이다. 작년처럼 올해도 딸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맡에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놓아둘 생각이다. 그 예전 엄마클로스가 내게 했던 것처럼.


사람이 많은 곳은 이제 별로다. 모처럼 온 가족이 집에 있을 테니 케이크 하나 정도는 사야겠다. 그리고 치킨을 시켜 먹을 테다. 내 어린시절을 소환하고 싶으니까.소박하지만 다정한 가족과의 시간이지금은파라오 슬롯보다 더 중요하다.게다가파라오 슬롯는 일 년에 단 하루지만,가족과의소중한 일상은 노력으로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다.그 사실을 알기에 더는파라오 슬롯가 빨리 오게 해달라고빌지도않는다. 그보다는 어두운 밤에도별을올려다 볼 여유를 갖게해 달라는 현실적인 소망이좋다. 별처럼 빛나는 순간은 마음만 먹으면언제든지찾을 수있다고 믿는다.설령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메리 파라오 슬롯보다메리 마이 라이프.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수요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