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몸살이 좀 심하게 와서 열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다. 몸이 안 좋아 그런 건지 약이 세서 그런 건지 잘은 모르겠으나 몸이 슬라임같이 흐물흐물거렸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슬라임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촉감으로 심리적 안정을 주나, 내 몸 상태는 흐느적거려 심리적 불안을 준다는 거다.
둘 다 나가고 없는 오전 10시, 냉장고에도 식탁에도 눈 씻고 찾아봐도 먹을 게 없었다. 비움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는 나 자신이 이리 야속할 수가 없었다. 힘이 나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갑자기 파라오 슬롯이 생각났다. 갈비를 사다 핏물을 빼서 삶고 청양고추 넣어 끓이자 라고 생각한 순간. 아이구~ 일이 복잡하고 번거로웠다. 밖을 내다보며 끓인다 안 끓인다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다 끓이자 승.끓여놓으면 다른 반찬은 안 해도 되니 은근 괜찮겠다는 파라오 슬롯으로 기운 것이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아 그전에 뭘 좀 먹자 라는 파라오 슬롯에서 써브웨이에 들어갔다. 난 기분이 좋거나 몸이 힘들 때 샌드위치를 먹는 버릇이 있다.단전에 힘을 모아 직원분에게 주문사항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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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으로 잘 접힌 두툼한샌드위치와 파라오 슬롯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우선 핏물제거를 위해 파라오 슬롯를 물에 담그고 샌드위치 포장을펼쳐 크게 한 입베어 물었다.
평소와 다른 이 메마른 참치샌드위치 맛은 뭐지?이런, 빵 사이를 펼쳐보니 야채는 할라피뇨와 피클뿐이고 소스는 아예 들어 있지 않았다. 직원분이 반대로 넣었군...이분도나처럼몸이안좋은상태로 출근했나 라는 파라오 슬롯이 들었다.가서 야채와 소스를 채워올까 하다 그럴 만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그냥 먹었다. 우적우적. 덕분에 냉장고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콜라를 따 마셨으니 새로운 맛의 조합이로세~다음번엔주문할때 또박또박더 큰 소리로말해야겠다 싶었다.
그 사이 핏물 빠진 파라오 슬롯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삶아 버리고 청양고추를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날 더운데 왠 사서 고생이냐며 혼자 투덜대다 시계를 보니 거의 5시가 다 되어 갔다.모처럼일찍온 두 사람 파라오 슬롯;몸도안 좋은데뭐 이런걸 다 했어파라오 슬롯;라지만 눈은 이미보양식에 가 있었다. 미래의알약식사를간절히바라는 '나'이지만그래도남편과아이가12먹으니 뿌듯하더라.
파라오 슬롯 위에 하얗게 낀 기름막을 보며 녹고 있는 빙하가 생각나 찍은 사진
다음날 아침 냉장고에 넣어둔파라오 슬롯 뚜껑을 열었다. 예상대로 기름이 하얗게 껴있었다. 숟가락으로 기름을 걷어냈다. 그 모습이 녹고 있는 빙하를 연상케 했다.이 기름은 조금씩 없어질수록 맑은 국물이 보여 좋은데 점점 녹고 있는 빙하는 어찌할꼬. 얼음덩어리도녹고 두꺼운 얼음이 갈라지며 북극곰들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걸 뉴스에서 접할 때마다 마음이 참 안 좋다. 북극곰들은 자신의 거처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그 이유를 알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 친구들의 아지트를점점 넓혀주지는 못하더라도 더 이상 불안에 떨게 하진 말아야지!
파라오 슬롯;2~3 정류장은 걸어 다니고 에어컨도 가급적 틀지 말고 안 쓰는 전등은 바로 끄고물도 더 아낄 것!파라오 슬롯;
집에 돌아온 가족들에게 한 번 더 강조해서 설파한 순간 이네들이 한 마디 한다.
파라오 슬롯;이 더운 날 열심히(?) 걸어 다니고 냉방기를 돌같이 보듯 해서.. 그래서 몸살난 거 아닐까?!파라오 슬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