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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인생파라오 슬롯
텅 빈 서점에 파라오 슬롯이 들어왔다.
책장은 커다란 탑차에 분해된 채로 실려왔다. 설치 기사님이 먼지를 폴폴 날리며 조각조각인 파라오 슬롯 능숙하게 조립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조립이 완성되고 보니 책장 이곳저곳에 꽤나 큰 상처들이 나있었다. 판매업체에 전화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설치 기사님께서 '이런 거 아무나 안 해주는 건데...' 하시며 주섬주섬 온갖 나무색 마커가 담긴 케이스를 꺼내드셨다. 한눈에 책장과 가장 비슷한 색의 마커를 꺼내드시곤 슥슥- 책장의 상처 난 부위를 칠해주셨다. 마치 빨간약을 바르듯.
그 결과 상처라곤 하나 없이 단정해 보이는 파라오 슬롯이 책방 한편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드디어 '서점' 모양새가 얼추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바로 파라오 슬롯 입고할 시간!책 입고야말로 파라오 슬롯을 시작하는 사장님들이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 아닐까. 합법적으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는 파라오 슬롯지기로서 할 일을 할 뿐이야'라며 책을 얼마든지 잔뜩 구입해도 괜찮으니까.
책방을 열기 전, 나는 yes24 장바구니에 읽고 싶은 책 NN권을 담아놓고 이번 주문에는 어떤 책을 사야 할지 고심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당장 읽고 싶은 책을 2-3권 정도로 추려 구입하는 과정을 반복하곤 했고. 신기한 건 주문을 여러 번 거듭해도 장바구니의 숫자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장바구니의 '전체선택'을 버튼을 클릭해 결제하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부자가 되지 않았음에도 장바구니의 '전체 선택' 버튼을 눌러 책을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파라오 슬롯 새로 채우던 초반의 이야기다. 책방 운영 3개월 차, 또다시 책 주문하기 전 수많은 고민 끝에 개별 선택 버튼을 눌러 책을 주문한다.)
그래서 파라오 슬롯지기는 책을 어떻게 입고할까?
일단, '서점 사업자'등록을 해야 한다. 사이트마다 그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b2b를 관리하는 담당자에게 메일로 사업자등록증을 전달해 인증을 받는 방식이다. 교보문고, 알라딘, yes24와 같은 일반 인터넷 서점이나 웅진 북센 같은 B2B 사이트 그리고 문학동네나 민음사와 처럼 출판사와 직거래도 가능하다.
한때 민음사와 문학동네 북클럽에 가입할 정도로 두 출판사에 크나큰 애정이 있는 나이기에 출판사 담당자분들에게 "안녕하세요, 서점 자기만의 공간 xxx입니다."라며 메일을 보낼 땐 정말이지 너무나도 떨렸다. 파라오 슬롯 만들고 유통하는 은밀한 세상에 발을 한 발짝 내민 것 같아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신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파라오 슬롯 입고해야 한단 말인가?
장바구니에 NN권은 쯤은 쉽게 담아두던 나였기에 책 입고만큼 쉽고 재미있는 일이 또 없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파라오 슬롯 입고하려니 꽤나 막막했다. 왜냐하면 나는 엄청난 '잡식성' 다독가이기 때문. 해리포터와 듄, 반지의 제왕, 드래곤 라자 같은 SF/판타지 시리즈 물에 푹 빠져지 내다가 갑자기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애거서 크리스티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미스(추리/미스터리/스릴러)를 정주행 하다가도 에세이, 자기 계발, 그림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장르를 넘나들며 읽는 사람이 바로 나다.
자고로 동네파라오 슬롯이라면 파라오 슬롯지기의 취향을 엿보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 법, 이라고 생각하던 나였기에 나의 yes24 장바구니는 취향 없는 자의 심란함 그 자체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다 생각해 낸 것이'누군가의 인생파라오 슬롯'이다. 나의 취향만을 고집하지 말고 타인의 취향을 소개해보기로 했다. 당시 나는 도서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책 꽤나 읽는 도서블로거 이웃이 많았다. 그들에게 자신의 추천 이유와 함께 인생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많은 댓글이 달렸고 나는 이웃들이 정성스레 추천해 준 책을 하나하나 살펴본 뒤 책을 입고해 파라오 슬롯 꾸렸나갔다.
처음 도입했던 타 큐레이션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그중 인생파라오 슬롯만큼은 견고히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지금까지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도 '누군가의 인생파라오 슬롯'의 책들이다. 책을 구입하는 손님들은 수줍게 '(추천 이유가 적힌) 종이도 같이 가져가도 되나요?'라고 물으신다. 그럴 때 정말 뿌듯하다.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을 책을 통해 이어드린 것만 같아서.
서점에 직접 발걸음 한 손님들에게도, 인스타로도 꾸준히 '인생책'을 추천받으며 더 많은 인생책을 파라오 슬롯에 꽂아 소개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다음 달에는 서점에 자주 방문하시는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책 여러 권을 추천받아 'xxx작가님의 파라오 슬롯'을 꾸릴 예정이다.
인생책이라는 단어가 가끔은 너무 버겁게 느껴지시는지 제보를 받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그럼에도누군가의 인생책을 마음껏 살펴보며 나의 인생책 또한 찾을 수 있는 '인생파라오 슬롯'이 되길 바라며오늘도 열심히 제보를 받고 파라오 슬롯 입고하고 그 이유를 네모난 종이에 반듯하게 옮겨 적어본다.
번외) 혼인서약서의 내용 중 남편이 했던 약속
"파라오 슬롯 좋아하는 아내에게 yes24 장바구니에 담겨 있는 모든 파라오 슬롯 사주지는 못하지만, 아내가 yes24에서 1년 내내 가장 높은 등급을 유지하더라도 눈감아 주겠습니다."
백화점 VIP는 못되더라도 서점 플래티넘 등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던 나. 한때 세계여행 하느라 실버 등급이 되었을 땐 어찌나 속상하던지. 파라오 슬롯을 열며 다시 등급을 회복해 나갔고, 짝꿍은 혼인서약서의 약속대로 여전히 플래티넘 등급을 유지하고 있는 나를 전혀 나무라지 않는다. 서점 사업자라 등급에 맞는 혜택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포기 못하는 나의 쓸데없는 서점 등급 욕심이다.
혹, 인생파라오 슬롯 제보하고 싶은 분이라면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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