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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상품은 파라오 슬롯이 있다

글은 패션산업의 디지털 혁신을 위한 컨퍼런스 & 미디어 플랫폼 디토앤디토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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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 바닥의 파라오 슬롯이 예술품이 된 사연

2016년 5월,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두 명의 10대 청소년이 흥미로운 장난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들이었지만, 몇몇 작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그려도 저것보단 잘 그리겠는데?" "도대체 예술의 기준이 뭐야?"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불평만 하고 지나갈 것이다.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미술관 리뷰에 자신의 불만을 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발상과 행동의 차원이 달랐다. 본인들이 쓰고 있던 파라오 슬롯을 미술관의 바닥에 내려놓고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파라오 슬롯사진 출처: TJ Khayatan / Twitter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들이 바닥에 놓은 파라오 슬롯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관람객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흔하디 흔한 파라오 슬롯을 단 하나뿐인 예술품으로 인식했다. 파라오 슬롯을 자세히 보기 위해 무릎을 꿇고 보는 사람부터 사진을 찍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순식간에 '상품'은 '예술품'으로 탈바꿈했다.

(참조 문헌: Elle Hunt, "Pair of glasses left on US gallery floor mistaken for art", The Guardian, 2016.05.27)


# TPO에 따라 바뀌는 상품의 가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도 미국 로스앤젤레스(이하 LA) 여행 중에 인상적인 스노우볼을 본 적이 있다.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마력의 스노우볼이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했다.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그 스노우볼의 바닥을 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MADE IN KOREA


그렇다. 한국에서 만든 물건을 미국에서 구매하면서 특별한 물건이라 생각한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심지어 훨씬 더 싼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스노우볼을 말이다. 동일한 물건이었지만, LA 기념품 샵에서 보고 느꼈던 감정과 인터넷 쇼핑몰에서 보고 느낀 감정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LA에서는 마치 그 순간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기념품처럼 느껴졌지만,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품이었다.

앞서 말한 공간의 차이 뿐만 아니라, “언제 접했는가?” “어떠한 상황에서 접했는가?”와 같은TPO(Time/Place/Occasion: 시간/장소/상황)에 따라 우리는 같은 것을 달리 보게 된다. 나는 이를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파라오 슬롯'이라 부르고자 한다.


# 파라오 슬롯 활용하는 브랜드

파라오 슬롯 뜻하는 영어 단어 context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함께'를 의미하는 'con'과 '짜다 혹은 엮다'를 의미하는 'text'의 조합이다. 즉 어떤 것의 의미는 그 자체가 아닌, 그것과 함께 엮여 있는 모든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상품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파라오 슬롯은 상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박물관 바닥의 ‘안경’이나 LA 기념품 샵의 ‘스노우볼’은 모두 흔히 볼 수 있는 상품이었지만, 특별한 파라오 슬롯 속에서 특별하게 느껴진 것이다. 이를 사업에 제대로 반영한 대표적인 브랜드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젠틀몬스터다.


젠틀몬스터는 자사의 안경을 단순히 '상품'으로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파라오 슬롯 활용해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기존의 모든 안경 브랜드 매장은 안경점이었다. 매장의 크기와 디자인에 차이는 있었지만, 고객의 눈에는 모두 상품을 판매하는 안경점으로 보였고, 상품의 가치는 기능 이상의 가치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하지만 젠틀몬스터는 매장을 단순한 상점이 아닌 박물관으로 변모시켰다.


젠틀몬스터는 '퀀텀 프로젝트(Quantum Project)'라는 이름으로 매장 내 설치미술을 15~25일마다 변경하며 고객들에게 새로운 전시 경험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고객은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관람객'이 되었고, 안경은 단순한 '상품'이 아닌 '예술품'이 되었다. 이렇게 브랜드는 파라오 슬롯 창조하며 자사의 상품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파라오 슬롯젠틀몬스터 홍대 플래그십스토어에서 진행되었던 '퀀텀프로젝트'. 사진 출처: 젠틀몬스터


#샤넬의 파라오 슬롯

패션 브랜드 중 파라오 슬롯 가장 잘 활용한 브랜드로 샤넬을 꼽을 수 있다. 대부분의 패션쇼는 세련된 음악이 흐르는 길고 좁은 런웨이를 모델들이 당당히 걸으며 진행된다. 그러나 칼 라거펠트의 샤넬은 달랐다. 그들의 패션쇼는 전통적인 런웨이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세계 속에서 펼쳐졌다. 이는 칼 라거펠트가 창조한 환상적인 무대이며, 그곳에서 샤넬의 옷은 일상을 초월한 초현실적인 세상의 옷으로 전달된다.


샤넬은 세상의 모든 브랜드가 공유하는 동일한 맥락 속에서 그들의 옷을 단순히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샤넬은 '새로운 세계'라는 독창적인 파라오 슬롯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샤넬의 상품은 한 차원 높은 가치를 지닌 옷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파라오 슬롯
2018, 2019 샤넬쇼. 사진 출처: 샤넬 유튜브 채널



#작은 브랜드가 파라오 슬롯 활용하는 방법

모든 브랜드가 젠틀몬스터나 샤넬처럼 독자적인 파라오 슬롯 창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나 작은 브랜드는 더더욱 그렇다. 제대로 된 파라오 슬롯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라오 슬롯 창조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맥락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오리온의 '마켓오 리얼브라우니'다. 이 상품을 기획한 노희영 대표는 당시에 가장 핫했던 아티스트 빅뱅의 파라오 슬롯 활용했다. 빅뱅 콘서트에서 ‘마켓오 리얼브라우니’를 나눠준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콘서트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특별하다. 특히 아무런 이미지가 없는 신규 브랜드라면 이러한 이점을 크게 누릴 수 있다. 이 특별한 경험은 그대로 '마켓오 리얼브라우니'의 특별함으로 전이되었고, 이 덕분에 높은 가격과 낯선 제형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 혹은 가치에 가장 잘 어울리는 파라오 슬롯 찾아내야 한다. 파라오 슬롯 찾아냈다면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거나(젠틀몬스터, 샤넬) 그러한 파라오 슬롯 제공하는 사람과 협업하면 된다(마켓오 리얼브라우니).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고객이 브랜드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 상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면 혹은 가격경쟁의 늪에 빠져 있다면, 나의 상품과 서비스를 빛내 줄 특별한 파라오 슬롯 찾아보자. 맥락에 따라 상품의 가치는 달라진다.


[1인 기업가라면 꼭 읽어야 할 책!]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35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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