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아흔여섯의 삶을 통한 바카라 토토들
바카라 토토를 보내드리며
예상한 시간이 다가왔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짐작했다. 하루빨리 임종을 봐야 한다는 급박한 연락이 아니었다. 담담한 목소리. 일주일 전부터 부모님은 바카라 토토가 계신 부산에 더 자주 오고 가며 바카라 토토와의 이별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예상하고 준비했던 시간들.
1월 18일, 바카라 토토가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아이에게 "(외) 왕바카라 토토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해"라고 설명해 줬다. 마침 주말이었고, 아이의 방학기간인지라 세종과 부산, 3시간이 걸리는 편도시간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 이른 아침에 나섰던 세 식구. 무거운 발걸음으로 부산 보훈병원에 맞닿았다.
친가 가족 중에선 가장 큰 손주였던 나. 하지만 가족 행사에는 자주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회사생활하며 아이를 키우는 일이 고되었기에, 원거리에 사는 이유로. 여러 핑계를 대며 원가족과 자주 만났지만 결혼 후 친척들과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부산 성당 결혼식 때 보고 오랜만이네" 올해로 결혼한 지 만 10년, 그간 부모님 통해 소식을 접했던 고종사촌 들과 삼촌들, 고모들. 30명가량 되는 대가족이 한 번에 모일 수 있는 기회란 쉽지 않다. 시간의 흐름만 직시한 채 모두 그대로였다. 안부 소식을 물으며 이야기의 소재가 떨어질 때쯤 가족들은 문상객을 맞이했다. 각자의 추억하나를 가지고 바카라 토토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꺼내기보단 오랜만에 마주했기에 삶의 안녕을 묻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바카라 토토와 추억한 시간을 돌아보면 많지 않았다.성묘, 제사, 명절, 부산, 좌천동, 럭키아파트, 서면, 주례동.요즘 시대에 어색한 단어들이 바카라 토토를 연상케 한다. 늘 바카라 토토는 가족 중에 중심이 되시려고 했기에 그 비위를 맞춰드리려고 온 가족이 애썼던 기억밖에 없었다. 사춘기를 보낸 두 아이를 키우며 바카라 토토, 할아버지의 안식처를 위해 분양을 받아 새 집으로 이사 가던 날. 매달 조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 대출금을 갚으며 외벌이 아빠의 수입으로 학원비와 식비를 쪼개어 써야 했던 엄마의 지난 중년의 시간이 애처로운 기억뿐이다.
가슴 넉넉하게 가족을 품어줄 수 있었던 바카라 토토와의 시간들을 굳이 세어보자면 많지 않았다. 그나마 남편이 처음 바카라 토토께 인사드리러 올 때 손자사위 손을 꼭 잡고 나란히 앞장서서 가던 그 뒷모습이 가장 강렬히 내게 남아있다. 이후 신혼 때 세종으로 이주한 후, 재취업하기 위해 애썼던 2016년 9년 전, 부모님은 바카라 토토를 모시고 제주도로 함께 여행 갔던 적이 있었다. 세 분의 여행길에 나도 동행했다. 외식하기 어려우셨던 바카라 토토를 위해 포항에서 미리 바지런히 식사거리를 챙기셨다.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날
할머니의 시간과 나의 바카라 토토 겹쳐 지나쳐보면 40의 숫자가 교차한다. 마흔. 올해 마흔을 넘긴 나는 할머니의 친손주 중에서 첫 손녀다. (아빠보다 일찍 결혼한 고모의 사촌오빠, 언니를 제외하면) 쉰여섯, 첫 손주를 만났음에도 할머니는 기뻐하지 않으셨다한다.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시절, 첫 장남이었던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빠는 손 씨 가문의 첫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년생 남동생이 태어나서야 엄마의 시름이 걷혔다. 돌도 안 지난 아이를 둘러업고 임신한 몸으로 포항에서 부산을 오고 갔던 시간은 엄마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매년 명절 외 제사일을 챙기던 부모님 덕에 탕국, 튀김음식 등은 일상에서 먹는 음식으로 알고 살았다. 지금에서야 성묘, 제사는 많이 축소되었고 의례적인 행사로 치부되지만, 왜 그리 아빠는 제사와 성묘, 족보에 집착했는지. 그 집착은 엄마의 청춘을 소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가져갔고, 내가 결혼하고서야 당연시 엄마의 딱한 삶이 헤아려졌다.
12시간가량 상복을 입고 가족들을 마주한 시간은 그 어느 시간보다 더디게 흘러갔다. 내일 출근을 앞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재촉하고, 아이와 부산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4일장으로 준비했었다. 아침 신문을 통해 접했던 소식대로 3일장이 아닌 4일장에서 5일장까지. 겨울철에 화장터가 분주하다고 한다. (독감 사망에 화장장 대란, 4일장 치르고 타 지역 원정)
캐리어에 이틀 가량 입을 옷들과 소지품을 챙겼는데, 다행히 처음 예고했던 화장터가 아닌 경주 화장터에 자리가 나서 3일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바카라 토토의 입관식. 곱디고운 자태로 할머님의 모습을 바라본 가족들은 마지막 인사를 모두 고했다. 각자 속 안의 이야기를 다 꺼낼 수 없겠지만, 바카라 토토 가시는 길 평안하시길 바라며. 요양원에서의 짧디 짧은 3주간의 시간을 보내기 전, 노환이었지만 혼자 사시는 삶은 참 정갈하셨다.
발인하기 전 장례버스를 탄 가족들은 바카라 토토가 사셨던 집을 돌아봤다. 오랜만에 들렀던 바카라 토토집은 바닥까지 맨질맨질 깨끗했다. 둘째 고모가 자주 와서 집을 돌아봤다고 하지만, 할머님의 성품이 드러날 정도로 창문에 먼지 한 톨까지 없었던 집.
냉장고에 드시던 반찬들, 창고엔 챙겨둔 생필품. 예전보다 살림살이가 줄었지만, 아흔이 넘는 연세임에도 쓸고 닦으며 자신의 바카라 토토 정갈히 사셨던 할머니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 많은 걸 아끼고 그리 가셨네요." 찬장과 서랍, 옷장들을 모두 살펴본 엄마가 큰 목소리를 내었다. 애써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부모님은 유독 할머니 집에서 오열하셨다.
사진과 그림일기가 그 가족의 역사로
벽에는 칠순잔치였던 날 찍었던 대가족 사진들이 가족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20년 전 그 시간들이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가족들의 역사가 그대로 걸려있었다. 동생과 어깨동무하며 웃고 있었던 유아기 시절, 서른 중반이 된 고종사촌동생이 군대 입대한 날 찍은 사진, 이제는 서른에 가까운 막내 사촌동생의 돌 시절 기념사진까지.
그 흑역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썼던 내 일기장에 고스란히 바카라 토토되었다. 발인을 마치고 친정집으로 돌아와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일기장을 훑어봤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와 요즘 매일 일기 쓰는 습관을 만들고 있는지라, 자연스레 찾게 된 나의 과거사에서제사, 부산, 어버이날, 성묘, 밀양 등조부모님과 관계된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아이의 시선에서도 조부모와 함께한 시간들이 지배적이었기에 일기장의 바카라 토토을 매일 남기지 않았을까. 고스란히 그 시간은 일기장에 지울 수 없는 바카라 토토이었다. 짧은 3일간의 시간 동안 한 사람의 바카라 토토을 훑어보기엔 일기장과 사진이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남긴 유품은 그의 것이기에 남은 이들의 추억으로 보관하기가 쉽지 않다.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돌아보며, 나의 바카라 토토 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일기장과 사진이라는 걸. 새기며... 최대한 내가 가진 물건에 대한 애착보다 필요한 물건만 소유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자주 갖어야겠다는 마음을 새기게 되었다.(마지막 길을 가기 전에 단 한 가지만 가져간다면, 여러분은 어느 걸 가져가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