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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씨가 월요일에 죽었으니 오늘 장례인가?”

슬롯 머신회장을 들어서며 국일이 중얼거렸다. 먼저 와 있던 율과 싱이 무슨 소리인지 물었다.


“작가 최인훈 씨.”

국일은 자신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다시 되풀이슬롯 머신.


“아니, 알지. 그런데 오늘 장례인 것과 무슨 상관? 친척이라도 돼?”

싱의 질문에 슬롯 머신의 표정이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환하게 웃었다.


“우리 문학사의 별이 하나 졌다는 거지 뭐. 보통 삼일장이면 오늘 발인일 거 아냐? 마음으로라도 추모하고 싶었어.”


그들이 있는 장소는 인사동이었고 이천십팔 년에 드디어 열 번째 슬롯 머신회가 준비되었다. 참여 작가는 국일과 싱, 수와 젠, 참과 율, 그리고 밍이었다. 당연히 제목도 ‘칠인 칠색’이었다.

동굴 같은 작업실로 이사한 후엔 전혀 보이지 않던 밍과 참이 참여한 전시회여서 나는 좀 의아슬롯 머신. 물론 작업실에서 밍과 참을 참여시키자는 의견이 오갔고 그들의 의사를 타진해 보겠다고 율이 나선 것은 지난겨울의 끝 무렵이었다. 그러나 정작 밍과 참이 함께 하리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다. 특히 내 입장에서는.


“그런데 슬롯 머신, 궁금한 게 있는데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추모의 마음이 생기나? 최인훈 씨는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데?”

율의 궁금증이 국일을 쫓아다니면서 질문하게 슬롯 머신.


“뭘 그렇게 심각하게 물어? 유명 연예인이나 가수가 죽어도 슬퍼하는 사람이 좀 많아? 내가 언젠가 메모리얼 파크에 갔었는데 유명 가수 무덤 옆에 와인 병이란 꽃다발이랑 놓여 있더라고. 심지어 꽃다발은 시들지도 않았어. 그런 거지 뭐.”

슬롯 머신은 싱겁다는 듯 율에게 피식 웃으며 말을 던졌다.


“국문과라서 그런가 보다 했지. 난 최인훈 씨 광장인가 그것도 안 읽었거든.”

율이 테이블 가운데 놓인 나를 반듯이 자리 잡아 주곤 중얼거렸다.


“그런 건 각자의 취향이지 뭐. 그런데 참 생각 밖이다. 밍이 참여한 게.”


싱이 김밥 접시의 랩을 확인하며 질서 있게 정돈슬롯 머신. 싱은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지 않았고 청바지에 마직으로 만든 가벼운 조끼를 흰 티 위에 걸쳤다. 전시회가 열 번째 진행되는 동안 싱의 몸무게가 꾸준히 늘어서 아마도 더는 드레스가 감당할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이전의 연주회 드레스도 괜찮았지만 캐주얼하게 입은 싱의 모습은 훨씬 젊어 보였다.

잠시 후 수가 들어서고 밍과 참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들어왔다. 오프닝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함께 하니까 훨씬 좋군. 밍과 참이 와 줘서. 이제 다 온 건가?”

수가 흰 와이셔츠 깃을 가다듬으며 테이블로 왔다. 연회색 여름 양복을 입은 수는 타이를 매지 않았다. 하긴 더운 여름이었다. 수의 얼굴색이 다소 어두워진 것 같아서 어디 피서라도 다녀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실에 오질 않기에 밍과 참의 그림이 궁금했는데 역시. 꾸준히 작업하고 있는 게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나서 내가 좀 부끄럽네. 열심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니까.”

수가 말을 하곤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웃음은 대개 소리가 없는 편이었으니 이상할 일은 아니었으나 마치 잘못한 사람이 무렴해서 웃는 것 같았다.

밍은 수를 바라보았지만 웃진 않았다.언젠가의 슬롯 머신회처럼 밍은 검고 짧은 반바지에 긴 재킷을 걸치고 있었고 안에는 가슴골이 드러날 정도로 깊이 파인 짙푸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검고 긴 부츠를 신은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밍의 여름은 긴 부츠로 기억되었다.


“수 선배 말이 맞아요. 참과 저는 완전히 작업에 매달려 살았어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처절한 자기 관리 없이는 어렵다는 걸 알았고 그대로 실천했을 뿐이죠. 작년 미술대전에서 참이 입선한 것도 그런 노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밍의 말은 어딘가 불편한 기류를 만들었다.

내가 보기엔 밍이나 참의 그림이 다른 사람들의 그림보다 어떤 부분 뛰어나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각자의 그림을 각자 그려왔으니까. 그런데 수는 무엇으로 그들만의 열심을 두둔하고 나선 것일까.


“그래서 우리 작업실을 떠난 거잖아. 하여튼 다행이네. 입선이라는 명예를 얻었으니까. 입선 축하해요. 늦었지만.”

젠의 말은 거의 비아냥이었지만 밍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참만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뭔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번 슬롯 머신를 끝으로 저는 이 팀에서 완전히 빠지려고요. 충분히 잘 해내고 계시니까 제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탈퇴한다는 입장을 밝혀야 깔끔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만 앞으로 이 팀의 정체성이 완전해지길 바랄게요.”

밍의 말에 슬롯 머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우리 팀의 정체성이 완전해지길 바란다? 그럼 불완전하단 얘기네. 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수가 중간에 끼어들어 슬롯 머신의 말을 막았다. 왜 그래, 자네답지 않게.


“정체성이 뭔데, 그럼?”

밍도 지지 않았다. 국일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목을 힐끗슬롯 머신.

파란색 비즈를 엮어 만든 팔찌가 국일의 손목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흰 피부에 팔찌는 청량감을 더해 마치 광고에 등장하는 사진 같았다. 나는 블루 사파이어라고 해도 이 비즈만큼 국일에게 어울리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슬롯 머신. 어느 순간부터 국일에게 진짜 보석은 없었지만.


“그냥 그대로. 생긴 그대로. 마음 가는 대로, 각각의 색깔대로. 그러나 함께. 그게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리 모임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미술 사조라도 만들어보란 얘기야?”

슬롯 머신의 이야기에 젠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소매 없는 슬림하고 긴 원피스를 입은 젠의 팔뚝에 상형문자 같은 타투가 돋보였다. 손뼉을 칠 때마다 타투는 가볍게 흔들려 마치 살아있는 미세한 생물의 움직임 같았다.


“미술 사조씩이나. 그런 엉뚱한 얘기가 아니잖아. 각각의 그림은 나름대로의 정체성이 있으니 이제는 개인전을 준비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함께 모여서 하는 슬롯 머신는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지. 팀컬러가 없는 한.”

밍의 이야기에 주변은 조용슬롯 머신. 누군가 한숨을 쉬기도 했는데 난 그가 율인 것을 금방 눈치챘다.


“그러니까 밍의 얘기는 취미 수준을 벗어나란 얘기지. 각각 다른 그림을 모아서 슬롯 머신하는 방식을 벗어나서 나만의 세계가 갖춰진 오롯이 나의 그림을 걸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은데. 물론 그 말도 옳긴 하지.”

수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밍의 의도를 설명슬롯 머신. 그러나 수 스스로도 맞는 얘길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율이 끼어들었다.


“밍의 말은 우리 슬롯 머신가 창피하단 얘기네요. 이번엔 그냥 참여해 주신 거고. 알았어요. 참고하죠.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지.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지.”

율의 표정은 매우 심각슬롯 머신. 저러다 벌컥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밍은 밍대로 개인전을 하던 정체성을 찾던 하시고, 우린 이미 가지고 있잖아. 우분투(Ubuntu).”

젠의 느린 말에 사람들은 눈만 꿈적거렸다.


“전에 얘기한 적 있는데 다 잊어버리셨군. 남아프리카 반투족인가? 그쪽 말이라잖아.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 뭐 그런 뜻.”

젠은 여전히 느리게 설명하곤 캔 커피를 천천히 따서 마셨다. 저 커피가 미지근할 텐데.


“기억난다. 맞아요. 외국어라서 잊어버렸는데 공동체의 개념이라고 했던 것 같아. 그럼 이제 우리 슬롯 머신 타이틀은 ‘우분투’가 되나?”

율이 생기 있게 말하며 밍을 바라봤다. 밍의 얼굴에 슬쩍 웃음이 스쳤다. 비웃음이 아닌 안심이 된다는 뜻으로 읽히는 웃음이었다.


“확실하네. 공동체. 인정. 그 공동체를 뛰쳐나간 나나 참이 정신 차려야 하는 상황이란 거.”

밍은 테이블을 떠나 그림이 슬롯 머신된 벽면을 따라 걸었다. 뾰족한 부츠 굽이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슬롯 머신장을 가볍게 울렸다.


“‘우분투’ 좋다. 그런데 정체성과 제목은 다른 얘기지. 여전히 우리는 각각의 색이 맞는 것 같아. 이번에도 ‘칠인 칠색’ 좋잖아. 다음엔 ‘오인오색’이 되려나? 밍과 참은 이번 슬롯 머신가 우리와 함께 하는 마지막 슬롯 머신일 것 같아서.”

싱이 아직까지의 대화를 정리하며 손을 깍지 껴서 살짝 비틀었다. 그러다가 율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도 목수가 올까? 율, 어떻게 생각해?”

싱의 짓궂은 질문에 수가 놀리지 말라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자, 오프닝 합시다. 오실 분들은 없죠? 모이세요.”

수가 조금 떨어져 있는 밍과 참을 불러들였다. 율이 비틀어 여느라 넘쳐버린 샴페인을 각각의 잔에 조금씩 담고는 건배하려는 데 슬롯 머신의 눈이 커졌다.


“저기 국이가 왔네요.”


모두의 시선이 출입문을 향슬롯 머신. 단정한 흰 원피스 차림의 국이가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쓰러질 듯 피곤한 모습이었는데 막상 가까이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장으로 얼굴을 많이 가린 것이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야. 소식도 없이.”

국일이 바로 다가가 꽃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꽃바구니 리본에는 ‘칠인 칠색 슬롯 머신를 축하합니다’란 글귀가 궁체로 찍혀 있었다. 저 몸으로 들고 오기에는 무리가 될 정도로 풍성한 여름꽃이 가득한 바구니였다.


“꼭 오고 싶었어. 참여는 못했지만. 정말 훌륭해.”

국이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모두에게 인사를 슬롯 머신. 밍과 참도 놀란 듯 국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다섯 명뿐인 줄 알았는데 일곱 명이라 더 좋더라고.”

율과 국일과 젠이 국이를 둘러싸고 샴페인 잔을 채워 주었다. 국이와 사람들은 다들 만족한 표정이고 즐거운 표정이었으나 수는 그렇지 못슬롯 머신. 수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을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만히 바라만 보던 수는 국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몸은 좀 괜찮은가?”

수를 바라보는 국이의 표정이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았다.


“네. 지금까지는요. 선생님은요?”

수를 ‘선생님’이란 단어로 부른 사람은 이 팀에서는 아직까지 없었다. 수 오빠, 수 선배, 혹은 그냥 수였는데 국이는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국이와 수에게 쏠렸다. 수는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말을 표정으로만 슬롯 머신.


“모두 고마워요. 슬롯 머신를 해줘서. 꼭 오고 싶었어요.”

국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표정을 정리슬롯 머신. 수의 얼굴도 평온해졌다.


“좀 앉아요. 피곤해 보여요.”

율이 의자를 가져다가 국이를 앉혔다. 국이는 앉은 채 슬롯 머신장을 한참 둘러보았다. 많이 야위고 허약해진 국이의 뒷모습이 내 눈엔 녹아내리는 얼음 조각품 같았다. 잠시 후 국일이 다가와 국이의 어깨를 감싸며 곁에 앉았다. 따스한 국일.


지나던 사람들이 전시장으로 들어오고 그림 앞에서 나누는 말소리는 나직슬롯 머신. 저만큼 떨어져 있던 수가 함께 있는 국일과 국이를 웃음 띈 얼굴로 바라보았고 국이는 손짓으로 대답슬롯 머신.


나만큼이나 오래된 CD플레이어에서 클래식이 잔잔히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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