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 씨랑 나랑 둘이 살아갈 집. 서로 다르게 살아서, 한 공간에 있다보면 부딪히기도 하고 서운할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린 잘해낼 거라고 믿어.”
“치- 그걸 선우 씨가 어떻게 알아”
“피- 내가 그러기로 결정했으니까, 지호 씨랑”
같이 살자고 했던 그날, 선우가 한 말이었다. 우린 잘해낼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고. 그러기로 결정을 했다고. 바보같이 왜 그땐 몰랐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있을 거라는 걸. 사람의 인생이란 이런 날들의 연속이라는 걸.
엄마와 아빠가 차례로 자신의 곁을 떠나갈 때, 가지말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던 그때, 다짐 비슷한 걸 했던 것 같다. 앞으로는 버림받지 말자고. 내가 먼저 버리자고.
떨리는 눈동자 속에 오롯이 자신만을 담아내는 선우의 눈은 왜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지.
가상 바카라;다시 말해봐, 서지호. 방금 뭐라고 했어?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너 버린다고, 태선우.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지호 씨. 서지호!가상 바카라;
선우가 떨리는 손으로 지호의 양 어깨를 마치 애원하듯 꾹 붙들었다.
가상 바카라;우리, 잘하기로 한 거 잊었어? 그러기로 했잖아, 나랑.가상 바카라;
지호가 다시 아래턱을 지끈 물었다.
가상 바카라;그랬지. 그런데, 분명히 우리라고 했어. 태선우 씨가.가상 바카라;
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가상 바카라;그래, 우리.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그런데 지금 우리가 어딨니. 계획은 너 혼자, 그거 틀어지면 뒷일 감당은 나 혼자야?가상 바카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현이 말했다.
가상 바카라;내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지는 않고. 마무리 잘 부탁하죠, 서지호 씨.가상 바카라;
미현은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 뒤를 쫓던 선우의 시선이 다시 지호에게 향했다.
가상 바카라;서지호, 넌 뭐가 이렇게 빠르고 간단해.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우리.가상 바카라;
선우를 마주본 지호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가상 바카라;아니. 나 그거 안 하고 싶어, 선우 씨.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뭐?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당신 하나 얻자고 내 인생, 시궁창으로 못 밀어 넣는다고. 그러니까 잘 됐어. 시작도 안 된 거, 정리하는 게 맞아.가상 바카라;
지호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선우의 두 팔이 툭- 떨어졌다. 그런 선우를 둔 채, 지호가 말했다.
“그거 알아? 어떤 상황에서는, 위선보다 위약이 더 나쁘다는 거.“
미련 한 톨 남지 않은 얼굴로 돌아서는 지호의 뒤에 대고 선우가 낮게 물었다.
가상 바카라;서지호, 나 사랑은 했냐.가상 바카라;
사랑은 했냐고 물었다, 그를. 평소 같았으면 너무나 당연히 나왔어야 할,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서로 주고받던 그 말이 나왔어야 했다. 자신과 선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나. 그러나 무의미했다. 사랑해도 어차피 함께 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내어주는 게 사랑이 맞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지호는 주저앉고 대답할 것이다. 태선우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분명 찬란한 이 사랑도 빛바래고 희미해져 어느 틈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내 부모처럼.
지호는 돌아선 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갈 길은 이미 정해졌다는 듯 꼿꼿하게 걸어서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무오리로 내려가는 기차 안.
처음 선우의 집으로 갈 때처럼 지호의 짐은 단출했다. 짐 가방 하나에 책이 몇 권. 슥슥, 차창 너머로 뭉개지듯 지나는 풍경을 그저 눈으로 쫓는 지호.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선우와의 운명이 이렇게 되리란 걸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사랑하는 남자의 그 흔한 친구도 한 번 만난 적 없다고 느꼈을 때, 서프라이즈로 병원 앞에 찾아간 날 자신을 보고 당황하는 선우를 봤을 때, 언뜻언뜻 비치는 그의 옆 얼굴에 그늘이 드리울 때.
예견된 미래를 바보처럼 애써 외면하고 바라보지 않은 것도, 그런 선우에게 '우리'가 돼주지 못하고 결국 혼자 모든 걸 해내라고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것도, 버림 받고 버려야 하는 선택 앞에 서고 싶지 않아 선우에게 결정을 미뤘던 것도, 모두 지호 자신은 아니었을까. 자신은 여전히 이렇게 도망치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 싶어 자조 섞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그 남자 태선우를 사랑했느냐고, 아니 여전히 사랑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지호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었다. 사랑, 한다고. 태선우를. 처음 누군가를 향해 가져본 간절함은, 사랑해서 떠난다는 거짓말 뒤에 숨겨 서서히 그 빛을 꺼뜨리는 거라고.
지호는 미련없이 서울을 떠나 다시 무오리로 돌아왔다. 서울에는 선우가 있었으니까. 발 들이면 안 되는 세계로 또 움직이면 안 되었기에. 지호는 반짝이는 도시에 등을 돌렸다.
몇 달 뒤. 매스컴에서는 연일 가상 바카라;태사랑 재단-'후계구도'에 박차 가하나가상 바카라;라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선우의 결혼 소식이었다.
결국 맞선녀랑 잘 된 건가? 나 같은 건 벌써 잊었구나. 하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자신을 붙잡을 명분 따위는 없겠지. 무오리로 내려온 뒤에도 선우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없었으니까.
가상 바카라;나쁜 놈! 잘 먹고 잘 살아라!! 메스 들고 살아서! 칼 같이 날카로운 놈아!!!가상 바카라;
첫차 안.
잔뜩 꼬부라진 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지호였다. 그녀가 하는 대로 무표정 하게 바라보던 이영이 말해다.
가상 바카라;미련이 많네. 이렇게 후회할 걸, 왜 놔 줘? 놔주길. 옆에 꼭 붙들어 두지.가상 바카라;
술 기운 때문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두 눈을 들어 올린 지호가 이영을 쳐다봤다.
가상 바카라;싸장.. 나,는 내가 버,렸는데... 왜! 꼭 내가 다시 버,림 받은 거 같,아?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글쎄. 서지호라는 인물이 버리는 거에 익숙한 거 같지는 않은데.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너무 정,확해서 재,수 없네. 사랑해서 떠,난다는 거짓말 같은 거... 안 들,어 봤어?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그러게. 그런 어록은 누가 만들었나 몰라.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그거 다 뻥이다? 개뻥.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개뻥이라고?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사랑하면 꼭 붙,어 있어야,지.. 왜 떠나! 어느 시덥,잖은 인간이 술,김에 뱉어낸...!! 개똥철학인 거지.가상 바카라;
가상 바카라;개똥철학이건 뭐건.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보고싶어 죽겠단잖아, 그 남자가.가상 바카라;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이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흐트러진 게. 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차곡차곡 차올라 지호의 두 눈에서 쏟아져내렸다. 선우를 떠나고 단 한 번도 울지 않은 지호였다. 그래서였을까. 속에 쌓여만 있던 깊은 웅덩이가 더는 고여있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 그 남자 태선우가. 죽을 만큼.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지호의 뺨 아래로 아롱져내리는 그 밤, 이영은 조용히 그녀의 눈물을 바라봐주었다.
가상 바카라;그냥 이럴 땐, 소리내서 우는 거야 지호 씨.가상 바카라;
토닥토닥. 지호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이영은 그저 먼 데를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가상 바카라;흐... 흐흐흑... 나 너무 미련하지. 나.. 너무 바보 같지. 나, 너무 답답하지...가상 바카라;
이영이 낮게 말했다.
가상 바카라;사랑은 그런 거더라. 미련하고, 바보 같고, 답답한 거.가상 바카라;
그날부터였다. 지호의 방황이 시작된 것은.
주말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 나이트에 간다. 평일 저녁에는 매일 소개팅 약속을 잡는다. 새로 생긴 헌팅 포장마차에서 간간히 생판 모르는 남자들과 어울려도 본다.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그 전에도 알았을까. 아마 태선우가 아니면 결코 몰랐겠지.
너 아니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쇼가 선우의 귀에 흘러가기를 미련하게도 기다렸던 건지.
지호는 매해 벚꽃이 가장 흐드러지게 핀 시기가 찾아오면 어기없이 아팠다. 그렇게 4년. 올해도 온 몸을 에워싸는 아픔에 몸살을 앓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