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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벗은 남자의 라이브 바카라, 액자 뚫고 나오겠네

국립 중앙 박물관-'비엔나1900, 꿈꾸는 예술가들'을 다녀와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오는 3월 3일까지)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비엔나 1900'의 의미부터 설명하자면 19세기 말, 다른 유럽 국가들은 고답적이고 보수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예술 사조들이 생겨난 것에 반해 유독 오스트리아는 전통만 답습하면서 예술의 침체기를 맞고 있었다.


이때 클림트를 주축으로 한 예술가들이 보수적인 빈 예술계에서 자신들을 분리해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분리파(1897년)를 만들었고, 여기엔 미술뿐 아니라 음악, 건축, 공예, 디자인 등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했다.


빈 분리파는 1898년, 자신들의 이념을 펼칠 전시관 '제체시온(Secession)'을 만들어 자국의 진보적인 예술가들 라이브 바카라을 선보이고 고흐나 뭉크, 쇠라 같은 외국 작가들의 라이브 바카라을 전시하기도 했다.


이때까지 빈 사람들은 시대를 앞선 외국 라이브 바카라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제체시온이 그 역할을 한 거다. 또한 자기들 그림을 외국에 소개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는데, 전시관 입구에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확실히 했다.


의사였던 레오폴트는 이 시기 예술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매했고, 그의 컬렉션들은 훗날 레오폴트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에곤 라이브 바카라와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전시는 이 미술관 소장전으로 클림트에서 에곤 라이브 바카라까지 1900년을 전후로 한 빈 분리파 즉, 오스카 코코슈카,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 브론치아 콜러-피넬 등 빈의 모더니즘을 이끌었던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라이브 바카라원탁,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이 작품은 1918년 에곤 라이브 바카라가 그린 '49번째 제체시온' 전시 포스터로 테이블 중앙에 앉은 인물이 라이브 바카라다. 주변엔 그의 동료들이 앉아 있는데 유독 라이브 바카라의 맞은편 의자만 비어있다. 이 빈 자리는 누구의 자리일까? 같은 해 2월 클림트는 뇌졸중에 스페인 독감까지 겹쳐 사망했고, 라이브 바카라의 전시는 3월에 열렸는데, 라이브 바카라는 클림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포스터에 자리를 남겨 둠으로써 그를 애도했다.


클림트(1862~1918)는 금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밑에서 금을 다루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고 14살에 예술 공예 학교에 입학해 회화와 수공예 장식 등을 배웠다. 이런 배경은 훗날 그가 독창적인 예술을 구현하는데 밑받침이 된다.


1857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비엔나를 대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에 들어갔는데, 이때 많은 건축물이 들어섰고, 이들 건축물을 장식할 화가들이 대거 필요했다. 이때 클림트가 등장해 국립극장, 빈 미술사 박물관 등에 벽화를 그리면서 큰 명성을 얻는다.


라이브 바카라▲디오니소스 재단. 1886년.


이 그림은 비엔나 국립극장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으로 총길이 12미터에 달하는 대형 벽화로 제목은 '디오니소스 재단'이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으로 중앙에 까만 형상으로 그려졌고, 양쪽에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두 명의 '마이나드(Maenad)'가 지팡이(왼쪽)와 월계관(오른쪽)을 들고 있다. 이 주제를 국립극장에 그린 이유는 디오니소스 연회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연극의 기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 라이브 바카라은 이 습작과 비슷하나, 시스루 드레스를 입은 마이나드를 누드로 바꾸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1890년, 클림트는 이 라이브 바카라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로부터 황제상을 받는다. 이 그림은 고전적인 화풍을 따르고 있는데, 클림트가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인 프란츠 폰 마츠와 함께 '화가들의 동맹'을 결성하고 함께 그린 라이브 바카라이다.


1892년, 함께 작업했던 동생 에른스트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클림트는 아카데믹한 화풍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벨기에 상징주의자 페르낭 코노프의 영향을 받아 장식적이고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갔다.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 '키스'와 같은 라이브 바카라이 탄생했다.


라이브 바카라▲리하르트 게르스틀의 라이브 바카라

이 그림은 리하르트 게르스틀(1883~1908)이 그린 라이브 바카라이다. 크기도 크고(159×109) 눈빛이 액자를 뚫고 나올 듯 강렬해 그림 앞에 서면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 그림을 계속 보고 있자면 그에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데 그를 에워싼 아우라가 신비로움을 넘어 깊고 깊은 명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하다. 형형한 눈빛 아래 그는 어딘지 고요한 다른 세계에 침잠한 듯 보인다.


1902~1904년경에 그려졌으니, 그의 나이 20살 무렵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토록 에너지 가득한 그림을 그렸는지 놀라울 뿐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을 표현주의라고 부르는데, 오스트리아에서 표현주의를 처음 시도한 작가가 바로 게르스틀이다. 고백하자면, 개인적으로 이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라이브 바카라이다.


게르스틀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898년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보수적인 교습법에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고 자기만의 화풍을 찾아 나섰다. 그는 화가들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고 음악가와 철학자들과 어울렸으며, 이런 이유로 분리파에 속하지도 않았다.


특히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밀접하게 지내면서 그의 가족 초상화도 그렸는데, 1907년, 그의 별장에 놀러 간 게르스틀은 그의 아내인 마틸데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다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두 사람의 불륜은 결국 발각되었고, 마틸데는 게르스틀 대신 가족을 선택했다. 버림받은 게르스틀은 자기 라이브 바카라들을 불태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25살이었다.


천재 화가 게르스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전시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이번 전시에는 오지 않았지만, 그의 다른 라이브 바카라(설명하자면, 입은 웃고 눈은 우는)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의 작품은 한 번 보면 그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꽈리 열매가 있는 라이브 바카라, 에곤 실레


이 그림은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에곤 실레(1890~1918)의 '꽈리 열매가 있는 라이브 바카라'이다. 흰색 바탕에 검은 옷을 입은 실레가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동그랗게 눈을 치켜뜨고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이 라이브 바카라은 (32×39)로 크기는 작지만, 라이브 바카라이 주는 아우라는 엄청나다. 레오폴트 미술관에는 이 그림과 나란히 그의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칠의 초상화가 같은 구도, 같은 크기로 짝을 이뤄 걸려있는데, 이 전시에 발리 노이칠의 초상화는 오지 않았다.


철도회사 역장이었던 부친은 결혼 전부터 매독에 걸렸었는데, 이후 매독균이 뇌까지 침범하는 바람에 말년엔 심각한 정신 착란에 시달렸고, 라이브 바카라가 15살이 되던 해에 결국 사망한다. 아버지의 정신 착란 증상을 보고 자란 라이브 바카라는 성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내면화 된다.


라이브 바카라의 모친은 평소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부친의 사망 이후 라이브 바카라가 안정적인 직업인이 되길 바랐기에 화가가 되고자 하는 라이브 바카라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라이브 바카라는 여동생에게 지나치게 깊은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어머니와 아이


이 그림은 '어머니와 아이'라는 작품인데 라이브 바카라가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엄마와 아기가 엄마의 품속, 하나의 옷 안에 들어가 있는데, 아이의 표정은 공포에 질려있다.


아이는 당장 꺼내주지 않으면 패닉에 빠질 것만 같은 표정으로 관객을 향해 SOS를 보낸다. 엄마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아이의 어깨를 꽉 쥐고 있고, 아기는 연약한 손을 들어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토록 공포스러운 모자 관계라니.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라이브 바카라는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같은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클림트를 찾아간다. 클림트를 만난 라이브 바카라는 자기 작품을 보여주며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데, 클림트는 라이브 바카라의 그림을 보고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직감했다.


클림트는 스승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동료로 라이브 바카라를 받아들여 그의 작품을 구매하고 전시회에 소개하는 등 라이브 바카라가 화가로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열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클림트와 라이브 바카라는 28살 차이로 클림트는 이미 대가의 위치에 있었는데, 젊은 라이브 바카라를 기꺼이 동료로 인정했다는 건 라이브 바카라의 실력이 엄청났다는 사실과 더불어 클림트의 대인배다운 면모를 볼 수 있다.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여성(발리 노이칠)


클림트는 라이브 바카라에게 모델인 발리 노이칠을 소개했고, 두 사람은 화가와 모델에서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고아였던 노이칠은 라이브 바카라와 5년 동안 동거하면서 그의 모델이 되어 주고 집안 살림부터 시작해 다방면으로 그를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라이브 바카라는 어린 소녀들을 에로틱하게 묘사한 사건으로 투옥되어 재판받는 일을 겪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여자와 결혼을 결심하고 노이칠을 떠난다. 이에 상심한 노이칠은 1차 세계대전 종군 간호사로 지원해 일하다 23살의 나이에 병에 걸려 사망한다.


이 그림은 두 사람이 한창 연인이었던 시절 라이브 바카라가 그린 노이칠의 모습으로 회색 망토를 두른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라이브 바카라는 중산층 집안의 에디트와 결혼했으나 얼마 후 에디트는 임신한 몸으로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고, 에디트를 간호하던 라이브 바카라도 감염되어 에디트 사망 3일 후 눈을 감는다.라이브 바카라 입장에선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결국엔 노이칠도 라이브 바카라도, 새로 선택한 에디트까지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 새드엔딩 스토리가 되고 말았다.


이번 전시엔 특히나 드로잉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라이브 바카라의 작품들이 대거 왔으니 놓치지 마시길. 또한 에디트의 그림도 있으니 노이칠과 어떻게 다르게 묘사했는지 비교해 보시라.


1918년 오스트리아는 클림트, 에곤 라이브 바카라, 콜로만 모저, 오토 바그너라는 빈의 모더니즘을 이끌었던 거장 네 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하지만그들의 노력으로 빈을 예술의 주변부에서 다시 중심부로 옮겨 놓은 데는 성공했다.


한파로 인해 밖에 나다니기 힘든 겨울이다. 이럴 땐 실내에서 즐길 거리가 필요한데, 국립중앙박물관 방문을 추천한다. 지하철로 접근성도 편리하고 내부에 푸드코트와 카페도 있으니, 전시도 보고 식당에 앉아 라이브 바카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도 좋을 것이다.


클림트와 리하르트 게를스틀, 에곤 라이브 바카라의 몇 작품만 소개했지만, 훨씬 더 많은 작품이 있다. 특히 지금 봐도 너무나 세련돼 감탄이 절로 나오는 콜로만 모저의 디자인 작품들도 많으니, 디자인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



* 이 기사는 전시 도록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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