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사이트는 쩌렁쩌렁 온 동네가 울리도록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리고 동생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러지 마이소. 그만 하이소.” 영자 씨는 슬롯사이트를 말렸다. 슬롯사이트는 꿈쩍 하지 않았다. 이때는 내가 나서야 한다. 나는 작은 몸을 날려 두 팔을 벌려 슬롯사이트를 막아섰다. “슬롯사이트, 그만하세요. 슬롯사이트.” 그제야 슬롯사이트는 손을 내렸다. 나는 슬롯사이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사이 동생은 영자 씨가 데리고 나갔다.
“슬롯사이트,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어요. 그 그릇에 맞게 물을 담아야지요. **의 그릇은 슬롯사이트가 생각하는 그릇이 아닙니다. 기대를 그만 내려놓으세요.”
나는 말했다. 동생은 호기심이 많고 유쾌한 아이였다. 세상에 즐거운 것이 많은 아이였다. 머리는 비상했고, 만화와 게임을 좋아했다. 게임은 곁에서 힐긋 보기만 해도 룰을 알았다. 뭐든 하기 시작하면 프로 수준에 오를 정도로 꾸준히 했다. 단 한 가지, 학교 공부만 못했다.
경조 씨는 국민학교 6학년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오사카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한량 슬롯사이트와 매일 갯벌로, 밭으로, 장으로 다니며 삯품을 파는 어머니, 그리고 다섯 동생을 먹여 살려야 했다. 똑똑하고 잘생긴 경조 씨에겐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부산 신발 산업이 한창일 때, 좋은 머리와 성실함으로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력으로 그룹 임원을 지냈다. 입지전적 인물,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고향 동네에서는 다들 존경하는 사람. 부모에겐 효자, 동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낸 훌륭한 장남, 마을 사람들 취직시켜 주고 어려운 일은 도맡아 해결해 주는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내를 제압하고,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무서운 슬롯사이트였다. 소통, 그런 것 없었다. 항상 당신이 옳았다. 그나마 큰 딸 이야기는 들었다. 나는 슬롯사이트에게 따박 따박 대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슬롯사이트와 논쟁을 했다. 슬롯사이트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시작한 책 읽기와 글쓰기 덕분에 논리가 생겼다. 동생들을 위해서도, 영자 씨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슬롯사이트에게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30분씩, 1시간씩 슬롯사이트와 안방에 앉아서 토론을 했다. 슬롯사이트는 어떨 때는 한숨을 쉬며 돌아 앉았고, 어떨 때는 그만 나가보라고 하셨다. 그때는 슬롯사이트도 젊었고, 나는 치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슬롯사이트와 나 사이의 바운더리를 만들어갔다. 정신적 독립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내가 슬롯사이트와 논쟁하지 않고 순응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슬롯사이트도 자식을 하나둘 떠나보내고 나서 조금씩 변했다. 하지만 동생은 슬롯사이트와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다. 슬롯사이트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날, 거실에 걸려 있는 슬롯사이트 사진을 보고 동생이 말했다.“어머니, 저 사진 안 걸면 좋겠어요. 나는 아직도 슬롯사이트가 나를 야단치는 것 같아요.”나이 오십이 넘은 동생은 아직도 슬롯사이트가 무섭다. 동생은 슬롯사이트와의 관계에서 바운더리를 만들었을까?
관계의 바운더리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관계의 역학 안에서 새롭게 변형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고, 나부터 사랑하고, 그리고 소통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적당한 거리의 바운더리, 특히 친밀한 관계, 가족 관계 안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집 가훈은“따로 또 같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각자 잘 살자. 그것이 서로를,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 문요한, <관계를 읽는 시간을 읽고 이 장면이 생각나서 써 보았습니다. 날이 아주 춥네요. 꽁꽁 잘 싸매고 다니세요. 저는 A형 독감을 한차례 앓고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있어요. 독감 예방 주사 꼭 맞아야 되겠더라고요. 건강 조심하세요.
*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것입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