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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입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도로 옆에 퍼져있는 사슴이 보였고 나무줄기를 뛰어다니는 원숭이도 보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원하게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 바위도 나뭇가지도 그루터기도 모두 초록 이끼로 뒤덮여있었다. <가상 바카라 속 바로 그 세상이었다. 등산을 하면서도 동경하던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라타니운스이교의 마법인지 등산을 한다는 느낌보다 깊숙이 안쪽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수시로 사슴이 튀어나왔고 심지어 태평하게 웅크리듯 앉아 엉덩이를 들이미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짙어지는 녹음에 혹시라도 나뭇가지 위에 코다마가 앉아 있는 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상에 올라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시라타니운스이교와 주변 산봉우리를 보며 영화 속 장면이 생각났다. '사슴신이 분노해 거대해졌을 때 본 풍경이 이거였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봤다면 분노가 저절로 사그라들었을 텐데 말이지.'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어두워질때까지, 다음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혹시라도 산이나 늑대들이 모습을 드럴낼지도 모르니.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는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까지도 시라타니운스이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조용한 바다 마을 쿠리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연상시키는 곳이다. 좁은 이차선 도로를 거북이 걷듯 느릿느릿 달리는 버스와 옆으로 늘어선 1층짜리 목조 건물 그리고 도로를 따라 펼쳐진 해안가는 보기만 해도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곳이었다. 시라타니운스이교의 촘촘한 세상과는 또다른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잠시 고민을 했다. ‘가상 바카라상한테 전화를 해도 될까? 예의상 건넨 전화번호일 수도 있잖아’ 걱정은 기우였다. 가상 바카라상은 마치 오랜만에 본 조카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여기까지 와줘서 너무 고맙다며. 잠깐 인사만 아니, 차만 마시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가상 바카라상 옆엔 남편 분이 함께 나와 계셨고 어느새 나는 가상 바카라 아저씨의 옆자리에 타고 오카와 폭포로 향하고 있었다. ‘교통이 불편하니 폭포는 못 봤지? 온 김에 근처에 큰 폭포가 있는데 꼭 보고 가야 해!’ 오카와 폭포는 80미터에 달하는 자연이 만든 작품이다. 폭포에 다가설수록 머리카락이 춤을 추고 몸이 흔들거릴 지경이었다.

아저씨와 함께 돌아오니 아주머니는 가상 바카라을 준비하고 계셨다. 사실 처음엔 ‘잘 모르는 사람 집에서 가상 바카라을 먹고 가도 될까? 실례가 되는 게 아닐까? 혹시 이상한 데 끌려가는 건 아닐까? 바다마을이니 고기잡이 배라던가’ 신발을 벗고 집안에 들어서며 수만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이미 식탁 위에 앉아있었다.
미야케 상이 차려주신 저녁밥은 일본여행 3일 만에 먹는 제대로 된 한 끼였다. 소박한 일본 가정 반찬들이 나오고, 직접 뜬 회가 올라오고, 이탈리안 치즈까지 올라왔다. 이런 자리에 술이 빠질 수 없지. 일본 소주가 나오고 따뜻하게 데운 물과 정종까지 등장한 마당에 어색함은 사라지고 나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 단위로 늘어나는 요릿수와 술병과 더불어 이야기가 늘어났다. 나의 대학 생활과 전공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일, 가상 바카라에서의 삶과 부부의 자녀들 이야기까지 주제가 끊이질 않았고 분위기가 달아올라 유학 중인 미야케상의 막내딸과 전화 통화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지금 우리 엄마 아빠랑 술마시면서 저녁을 먹고 있다고요? 정말 미안해요. 하하하하. 근데 잘 부탁드려요' 미야케 아저씨는 달변가셨다. 당시 일본 총리는 아베였는데 동북아 정세에 문제를 일으키는 행동을 일삼아 자주 뉴스에 오르내렸다. 아저씨는 아베 때문에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시기에 이르렀고 우리의 주제는 한일 관계와 역사적인 문제로 넘어갔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먹고, 떠들고, 마시고, 웃다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남의 여행기를 읽을 때면 종종 등장하는 ‘길을 걷다 우연히 알게 된 낯선 이의 집에 초대받아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는 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얼마나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반신반의했었다. 낯가림 많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단정했고 책 속의 에피소드로 만족하며 작가의 인싸력에 혀를 내두르곤 했는데 그와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낯선 이의 친절, 재연 그리고 저녁식사 초대까지. 가상 바카라 여행은 계속되는 우연이 빚어낸 행복이었다.


가상 바카라에서의 마지막 날,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나와 토마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노란 스포츠 카를 끌고 미야케 아주머니가 당도하셨다. ‘그래서 레이짱 내일 간다고? 아쉽다. 좀 더 있었으면’ ‘그러니까요. 제가 일정을 너무 짧게 잡았나봐요…야쿠스기랜드도 못 보고 가겠어요’ ‘아, 그럼 내일 내가 같이 돌아다니면 어때? 나 운전 잘해’ 이렇게 마지막 날까지 신세를 지게 되었다. 노란 스포츠카에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리신 미야케 아주머니와 가상 바카라 투어를 시작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만 봤던 깎아지른 절벽과 거대한 폭포로 둘러싸인 대자연과 마주했고 온갖 열대우림 공원처럼 조성된 야쿠스기랜드에도 갔다. 따뜻한 기후 덕분에 지역 특산물이라는 사탕수수와 감귤로 만든 착즙주스도 마셨고 바로 옆에서 잡아 올린 생선을 떠서 초밥을 만든다는 현지 맛집에 가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등어 회도 맛봤다. 미야케 아주머니는 항구에 서서 고속선이 떠나는 순간까지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셨다.

인생 여행 주기라는 게 있다. 제멋대로 만들어서 나 혼자 사용하고 있는 개념인데 인생 곡선처럼 특정 여행 시기를 묶는 것이다. 연도 별로 묶는다든지 유독 많이 여행을 떠났던 시기를 묶는다든지. 내 인생 1차 여행 주기는 19살 혼자 떠난 부산여행부터 2018년 8월 첫 직장에 취직하기 전까지다. (참고로 2차 여행 주기는 승무원일을 하며 비행기를 탔던 시기다.) 직장인이 되어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전까지 매년 수 차례 여행을 떠났다. 인천공항으로 혹은 서울역으로. 마음 내키면 기차를 잡아타고 당일치기로 강릉도 가고 특정 기한 없이 통영에 머물렀다가 부산도 찍고 돌아왔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있으면 걱정 없이 떠날 수 있던 시기다. 승무원이 되기 전 여권에 남아 있는 모든 기록은 다 1차 여행 주기에 속해 있다. 그 모든 여정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그중에서도 가상 바카라는 특별하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동경하던 세계 그리고 그곳에서 받은 따뜻한 환영과 친절은 내가 내리는 결정과 앞으로 펼쳐질 여정에 대한 믿음을 심어줬다. 용감한 척해도 매 순간 망설이고 긴장하는 초보 여행자의 첫 탈피였다. 미야케 家에서 저녁을 먹으며 두 분께 여쭤봤다. 낯선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흔한 일인인가요? 시골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지금도 가상 바카라 여행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다시 그곳에 간다면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따라 해안도로를 달리고 싶고 미야케상의 단골 찻집에 가서 그녀와 해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