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유형은 거짓말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주인공이 지금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독자들에게 안겨주는 작가다. 그럼 면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연작소설에 등장한 슬롯사이트은 하나같이 이상하고 웃기고 사랑스러운데, 메인주 바닷가의 수학선생이었던 올리브와 그 주변 슬롯사이트의 이야기는 너무나 재밌고도 애달파 HBO에서 프랜시스 맥도먼드 주연의 6부작 드라마로 만들기까지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올리브가 가르친 애들이 어른이 되어 펼치는 또 다른 이야기들은 <버지스 형제나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같은 작품으로 뻗어가고 그중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라 끝내 소설가로 성공한 루시 바턴의 이야기는 <오! 윌리엄이나 <바닷가의 루시 등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얘기하면 '스트라우트 월드'의 인물 구성이 너무 방대해서 읽을 엄두를 못 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소설에 등장하는 한 슬롯사이트 한 슬롯사이트에게 애정을 가지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렇다고 뻔한 인물을 그려내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루시의 남편 윌리엄은 세 번이나 결혼을 했는데 그건 그가 바람을 자주 피워서다. 그런 윌리엄과 살았던 루시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두 번 했고 사별 전 남편 윌리엄과 다시 한 집에서 지내면서도 지금은 (크로스비에서 가까워진) 밥 버지스를 '사랑하고 있다'라고 윌리엄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복잡한 캐릭터다.
<바닷가의 루시는 젊은 아내가 어린 딸을 데리고 나가버린 70세의 윌리엄이 첫 아내 루시에게 도움을 청하다 그녀를 데리고 크로스비라는 바닷가 마을에 가서 지내는 이야기다. 마침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 19를 피해 간 것이지만 그들은 여기에서도 새로운 슬롯사이트을 만나고(자원봉사에서 만난 살롯 얘기에서 올리브 키터리지의 근황이 잠깐 나온다) 두고 온 고향과 가족 그리고 뉴욕을 생각하며 지나온 나날들을 곱씹는다.
이틀 동안 소설을 천천히 다 읽었다. 코로나 19 팬데믹 위기 배경 안에서 루시와 윌리엄 두 슬롯사이트도 자잘한 위기와 심란함을 겪지만 그들에겐 결정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고 '누구나 중요하다고 느낄 필요가 있어' 같은 너그러움도 챙길 줄 안다. 그리고 재밌는 이야기들도 있다. 나는 '발기불능'인 남자와 6년이나 바람을 피운 여자를 신기해하는 루시에게 "그런 건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인간 이해가 너무 좋았고 루시가 가난해서 소금과 후추통조차 없는 집에서 식빵에 당밀만 발라 먹으며 버텼다는 이야기엔 가슴이 아팠다(루시는 대학교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아이를 따라 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를 뿌린 뒤에야 '음식이 맛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출판사에서 계속 거절당해 뒤늦게 법학을 전공하고 잠깐 변호사 생활까지 한 적이 있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소설가로 성공한 건 너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변호사로 잘 나갔으면 우리는 이런 멋진 소설을 못 읽었을 테니까. 최근작인 <바닷가의 슬롯사이트부터 읽어도 괜찮으니 어서 읽으시기 바란다.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이 주는 신선한 감동과 함께 인간 본성을 믿는 성숙한 어른의 시선까지 동시에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