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슬롯3의 불편한 진실
무료의 함정
주차장에는 흙먼지 뒤집어쓴 버기카들과 오토바이들이 정갈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대수로 봐서 현재 사람들이 아주 붐빌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막 도착한 우리와 반대로 이미 한바탕 물놀이를 끝내고 돌아가는 이들도 보였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우리 포터가 주차를 했다. 그 사이 우리 바로 앞에 있던 버기카 군단이 삼삼오오 모여 우르르 입장하고 있었다. 우리도 뒤쳐질세라 땅에 발을 딛자마자 바쁜 걸음으로 블루슬롯3로 향했다.




블루슬롯3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딥한 초록물빛이 우리를 반겼다. 물 위에서, 물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유유자적 떠다니고 있었다. 서두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몸짓에서 여유가 느껴졌고 표정에서는 행복이 느껴졌다.
블루슬롯3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절벽 같은 산을 옆에 두고 있어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고요한 비밀의 장소 같은, '시크릿 슬롯'이라는 별명 그 잡채였다. 인공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충분히 자연스러웠고 신비스러웠다. 대체로 캄(calm)하지만 이따금씩 고요를 깨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짚라인과 외나무다리. 짚라인에서는 공중제비를 돌며 세상 화려하게 떨어지기도 하고, 목이 터져라 악을 쓰기도 하고, 겁이 나 마지못해 손을 놓고는 이 악물고는 올곧은 만세자세로 떨어지기도 했다. 떨어지는 모습, 텐션은 다 달라도 한결같았던 건 떨어지고 난 후의 반응이다. 누구 하나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외나무다리에서는 불꽃 튀기는 국가대항전이 펼쳐졌다.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모르는 두 사람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승부를 펼쳤다. 매 경기가 빅매치였다. 보고만 있어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승부가 나게 되면 우스꽝스럽게 추락하는 패자를 보며 깔깔깔 웃어댔다. 미래의 내 모습이 될 거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차분한 바이브와 에너제틱한 바이브가 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블루슬롯3는 모든 것이 예상했던 그대로였고 기대했던 만큼이었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딥그린의 물색. 블루슬롯3가 잘못한 건 아니고 흐린 날씨 탓이었다. 해가 쨍쨍했다면 아마도 속이 훤히 비치는 맑고 투명한 초록빛이었을 텐데... 그랬다면 한층 더 신비로웠을 것이고 정말로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었을 것 같다.






감상은 여기까지. 감상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우리도 즐기러 온 것이기에 본격적인 물놀이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자리 선점부터. 선택지는 2가지가 있다. 오두막 아니면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 자리값은 모두 무료고 비어있는 곳에 그냥 둥지를 틀면 되는 시스템이다. 각 자리마다 번호가 있어 음식이나 음료 주문 시 번호를 알려주면 가져다준다. 아무래도 오두막이 편하고 좋겠지만 오래 머무는 고인돌들이 대부분일 것 같아 우리는 테이블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쪽, 블루슬롯 기준으로는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테이블이 비어있었다. 다른 팀에게 스틸당할세라 날름 짐을 내려놓았다.
오두막대비 테이블의 장점은 물과 가깝다는 것. 리얼 레이크뷰에다 비공식적으로 1초 만에 입수가 가능하다.(비공식적 입수란 정식 입구가 아닌 그냥 바로 밑으로 내려가는 걸 말한다) 반면에 오두막은 테이블 뒤쪽의 길에서도 한 블록 정도 뒤에 위치해 있다. 물론 그래봤자 마찬가지로 비공식적 입수까지 10초도 채 안 걸릴 만큼이기는 하나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테이블의 파라솔과 앉아 슬롯 사람들의 뒤태 등 눈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많아 온전한 레이크뷰를 보기는 힘들다. 오래 머물 계획이고 놀이보다 휴양이라면 오두막을, 일정 시간 물놀이 불태우고 갈 계획이라면 테이블이 좋지 않을까... 하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그냥 취향 따라 고르면 되겠다.


















래시가드는 애초에 입고 왔고 수중촬영을 위한 방수키트를 입은 고프로와 방수팩 입은 핸드폰까지 챙겼다. 소중한 내 발을 위해 아쿠아슈즈도 신었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구명조끼. 블루슬롯3에서는 구명조끼를 무료로 대여해 준다 하여 따로 챙겨 오지 않았다. 호수 초입은 바닥이 보일 만큼 얕지만 중간으로 들어갈수록 급격하게 깊어지기에 상체를 수직으로 세운채 마치 물속에 서있는 것처럼 둥둥 떠있는 입영이 가능한 사람이 아니라면 구명조끼는 무조건 필수다.(입영 가능자라도 안전상 착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노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안전, 안전, 안전이 제일이기에 내 목숨줄 지켜줄 구명조끼를 가지러 갔다. 대여소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화장실 입구 앞쪽 공간에 놓인 철제 행거에 구명조끼들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으악!!!
이건 호숫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아니다. 내가 내는 찐 비명소리다. 정말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로 구명조끼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두 글자가 떠올랐다. '폐허'. 그야말로 폐허의 현장이었다. 일단 행거에 제대로 걸려슬롯 게 반도 안 되었고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구명조끼의 컨디션. 겉으로 봐도 지저분해 보였는데 뭐 이건 워낙 여러 사람들을 거쳐 갔을 테니 그렇다 치더라도 끈이 떨어져 있거나 버클이 망가져 슬롯 게 태반이었다. 아예 망가져 있거나, 한쪽 이가 나가있거나, 고정력이 약해져 손으로 약간의 힘만 가해도 바로 풀려버리는 게 대부분. 끈이라도 길면 어떻게든 이중삼중으로 묶어 입어 보겠는데 끈도 삭아서 너덜너덜한 게 많았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버클 두 개중 하나라도 정상인) 게 있으면 또 사이즈가 컸다. 이번엔 다섯 글자가 떠올랐다. '총체적 난국'.
이래 봬도 방비엥의 얼굴 같은 곳인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아니, 구명조끼가 이따위인데 다들 어떻게 놀고 슬롯 거지? 물속에 슬롯 사람들의 구명조끼 착용 실태를 확인해 보니 확실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단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은 구명조끼를 입지 않고 있었다. 반대로 대부분의 동양인(한국인 포함)들은 구명조끼를 입었다. 그런데 그중 몇 명은 구명조끼 색깔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아주 선명한 형광주황색의 새삥이었다. 무료대여를 한 게 아니라는 말. 그러고 보니 버기카를 타고 왔던 사람들 손에도 쥐어져 있었다. 이제야 사람들이 왜 투어로 오는지 이해가 됐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투어 상품에는 구명조끼를 비롯해 스노클링 장비, 방수팩 같은 물놀이 키트도 함께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를 할 수 슬롯 시간적인 여유도 없기는 했지만, 기본 물놀이 장비는 다 챙겨 왔고 구명조끼만을 위해 굳이 돈을 써서 투어로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안 한 것인데 구명조끼에 이렇게 뒤통수 맞을 줄은 몰랐다.
블루슬롯3에 대한 실망감은 이내 자기반성으로 바뀌었다. '그래, 내 목숨줄 지키는 건데 공짜로 지키려고 한 내가 바보지.' 그 어느 것보다 돈을 펑펑 쏟아부어도 모자라지 않은 게 안전인데 내가 안일했다. 돈이고 시간이고 뭐고 간에 기타 잡것들은 제쳐두고 오로지 무엇이 가장 안전한 방법인가에만 집중했어야 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고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물놀이를 안 할 수는 없으니 고르고 고르고 고르고 고르고 고르고 또 골라 그나마 다이빙을 하더라도 벗겨지거나 가라앉지는 않겠다 싶은 놈으로 하나 집어 들었다. 마냥 즐겁기만 할 줄 알았던 물놀이에 본의 슬롯게 스릴 한 스푼이 더해졌다. 떨렸다. 설렘의 떨림이 아닌 찐불안과 공포의 떨림이었다. 물에 들어가기 전 이렇게 떨렸던 적이 언제였나? 처음 수영을 배운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괜찮은 거겠지..?' 나머진 구력 9년 차의 만년 초보 수영러인 나의 수영실력을 믿어보는 수밖에.
*SMALL TIP : 구명조끼를 개인적으로 준비해서 가시던지 슬롯면 투어를 통해 가시기를. 장비 대여 시에도 꼭 꼼꼼하게 장비 상태 확인은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