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바흐의 음악이 평화의 대명사가 된 것이. 로스트로포비치가 무너진 베를린 장벽 앞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한 이후? 아니면 평화와 인류애를 노래하는 곡을 만든 작곡가들이 하나 같이 바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아니면 바흐가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크리스트교(루터교) 교회에서 교회음악을 작곡하며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6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바카라 꽁 머니이 인도한 바흐의 평화 속에서 행복했던 90분을 반추해보려 한다.
내가 기억하는 바카라 꽁 머니은... 리스트가 참 잘 어울리는. 그에 걸맞은 테크니컬한 연주자였다. 그래서였을까, 이번 내한 프로그램이 공개되었을 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 하나만 달랑 선정된 걸 보고 의외의 선택이다 싶었다. 바카라 꽁 머니은 리스트가 정석 아닌가요? (갸웃) 나중에 슈만의 <아라베스크 C장조 Op.18 이 오프닝 곡으로 추가되긴 했지만, 솔직히 아라베스크 짧은 그 한 곡 보다 바흐의 30개가 넘는 변주곡을 통으로 연주하는 것이, 즉 바흐의 변주곡이 메인 메뉴라는 건 클알못이 아니더라도 그냥 일반인들이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셋리스트였다. (슈만 아라베스크는 아뮤즈 부쉬였지 뭐...)
6년 만에 돌아온 바카라 꽁 머니은 왜 하필 바흐로 돌아왔을까. 이전부터 앓고 있던 고질적 건초염이 재발하여 고생했던 것도 알고 있었고(덕분에 조성진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중간에 한국계 독일인인 지나 앨리스 레드링거와 결혼도 있었고... 어쩌면 ‘기본으로, 처음으로 돌아가자’ 하는 생각에, ‘어느 정도는 구축해 놓은 자신만의 낭만파 사조, 현대음악 사조를 두고 바로크와 고전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Covid 19로 인한 팬데믹이 어느 정도 출구를 보이고 있는 현시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노래하고, 미 - 중간 새로운 냉전체제가 시작되는 건 아닌가 하는 이 불안한 세계정세 속에서,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시작될 이 무렵에 듣는 바흐라니...
원래 예술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전쟁을 앞두고서는 전쟁의 참상을 그리거나 그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풍요로운 현실에서는 그 풍요와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예술. 지나친 의미 부여 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벌어지려고 하는 또 다른 냉전의 한 축인 국가 출신인 바카라 꽁 머니,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이 그 반대편에 서야 할 국가 출신의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 현실과 무척 동떨어져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좋았다. 원래부터 예술은, 음악은 시대와 국경, 이념과 정쟁 모두 상관없이 만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니까.
어제 공연 한 줄 요약은 ‘기승전 염장질’이었지만, 전체적인 공연 느낌의 연장으로 앙코르 무대를 바라보자니 바카라 꽁 머니 부부의 염장질이 좀 희석되는 것 같다. 바카라 꽁 머니의 부인 지나 앨리스 레드링거와의 협연과 각자의 솔로 무대.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바카라 꽁 머니의 바흐를 듣는데, 내가 알던 바흐는 이런 느낌이 아닌데 어째서 바카라 꽁 머니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음악의 꽃은 ‘가정가정~’, ‘안정안정~’, ‘행복행복~’ 느낌일까 싶었다. 바흐가 애처가였고, 특히 후처 마리아 바르바라와의 사이도 좋았던 것, 아이들과 제자들을 위해 쓴 곡이 많은 것도 알아서 그런 느낌이 나나? 싶었는데, 본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무릎을 탁 쳤다. ‘바카라 꽁 머니은 다 계획이 있구나!!’ 무대 입구 너머 드레스 자락이 살랑이길래 설마 했지만 그 설마가 진짜일 줄이야.
결론적으로는 앙코르도 좋았다. 아니 본 공연보다 앙코르 임팩트가 너무 커서 본 공연이 어땠는지 공연 끝난 직후에는 본 공연의 여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연인 한 쌍이, 서로를 바라보며 협주를 하고, 눈을 맞추고 호흡을 맞추는 모습이, 그들의 손에서 빚어지는 음악이 보기 좋았다. 로베르트 - 클라라 슈만 부부의 환생이라 하더라도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시만요, 슈만은 9살 연하인데 바카라 꽁 머니은 12살 띠동갑 연한데요? 바카라 꽁 머니이 더 한 도둑놈 아닌가요? ㅋㅋ) 각자가 서로의 뮤즈가 되어주고 그로 인해 서로가 성장해 갈 모습이. 지나 알리스의 솔로곡 <엄마야 누나야의 편곡 버전을 연주하는데 합창석 아래 벽에 기대어 아내의 연주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이, 눈에서 발사되는 하트가, 조명 밖 어둠 속에서도 보일 정도였으니... (랑서방. 그러니까 알리스한테 잘해.) 창작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관계라 생각할 연인의 모습, 부부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기승전 - 부러웠다. 심술심술) 뮤즈이자 조력자이자 아내이자 연인이자 제 아이의 엄마인 그녀로 인해, 바카라 꽁 머니이 얼마나 더 자신의 음악세계를 키워갈까 궁금해진다.
앙코르 무대 얘기가 길어지긴 했는데, 바카라 꽁 머니의 골드베르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건초염 관리 잘하길. 오래도록 보고 싶다. 곧 오실 지메르만처럼... 희끗한 머리의 바카라 꽁 머니 연주도 궁금하다.’ 랑서방, 처외가 리사이틀 자주 와요. 내가 챙겨보러 가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