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가볍게 보기 좋은 에세이집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슬롯라는 처음 보는 단어를 발견했다. 구글에 검색해 봤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신기해서 이미지도 찾아봤다. 커다란 북을 짊어지고 분장을 한 사람들이 나왔다. 개화기나 전후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적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또 하나 배웠다. 새로운 지식이 늘었다. 모르는 단어를 배우는 것은 독서가 주는 작은 즐거움이다.
어린 시절에는 사전을 옆에 두고 책을 읽었다. 활자중독 기질이 다분했던 성장기를 보냈다. 모르는 슬롯가 나오면 국어사전을 펼쳤다. 그때마다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기분이 들었다. 중학생 무렵에는 영한사전이나 옥편을 꺼내 읽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이 갑갑할 때면 낯선 슬롯를 자주 찾아봤다. 기분을 전환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말은 종종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글은 나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복잡한 생각을 안겨주는 일이 없었다. 책이나 사전 속에서 발견한 문장과 슬롯들은 내면의 자양분이 됐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두껍고 무거운 국어사전 대신에 네이버 사전을 주로 이용했다. 지금은 그 자리를 구글이 대신하게 됐다. 하지만 한국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여전히 사전을 애용하고 있다. 오늘은 친돈야, 슬롯, 판체타라는 단어를 새로 알게 됐다. 검색하기 전에 문장의 내용을 토대로 단어의 뜻을 혼자 상상해 본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저녁식사를 차리는 장면에서 나온 판체타는 식재료가 분명했다. 파스타 종류를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정답은 이태리식 베이컨이었다.
다음에 코스트코에 갈 일이 생기면 판체타를 꼭 사 와야겠다. 슬롯는 어감이 빵이나 디저트 같았는데 옥수수가루로 만든 이태리 가정식이었다. 버터와 치즈가 들어가서 맛있을 것 같았다. 추운 계절이 되면 종종 먹는 콘스프가 떠올랐다.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또 늘었다. 식생활은 식탁에 앉아서 전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멋진 여행이다. 사진을 검색하다 조리법을 찾았다. 생각보다 간단해서 다음에 만들어먹기로 했다. 뇨끼를 처음 만들어 먹었을 때도 꼭 지금 같았다. 책에서 본 뇨끼를 보고 감자와 전분가루를 사다가 그날 바로 만들어먹었다.
요리와 관련된 슬롯나 용어는 대부분 책을 통해서 알게 됐다.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신기한 요리나 생소한 식재료가 자주 등장한다. 소설 속 인물의 성격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장치로 자주 쓰이는 편이다. 요네자와 호노부가 쓴 <진실의 10미터 앞이라는 단편집에 호우토우라는 요리가 나온다. 야마나시현의 전통음식인데 책 속의 묘사를 보면 호박이 들어간 우동 같았다. 호우토우 역시 소설 속 등장인물과 관련된 키워드다. 블로그를 검색해 보니 된장으로 맛을 낸 수제비와 칼국수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사진만 봐도 어떤 맛인지 알 것 같았다.
외국 작가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신기한 단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 소설가들이 쓴 책이 주로 그런 편이다. 외래어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문장이 자주 나온다. 낯선 단어를 발견하면 읽던 책을 내려놓고 구글링 해본다. 습관을 넘어서 이제는 거의 자동반사나 다름없다. 영화를 보다가도 비유적인 표현이나 특이한 유머가 나오면 메모했다가 꼭 찾아본다. 시대상이 반영된 단어나 유행어,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농담까지. 새롭게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동네 마트에 갔지만 역시나 슬롯 분말은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