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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머신이 대체 뭔데

슬롯 머신 이야기를 쓰다가 떠오른생각

정기황이란 건축가가 쓴「슬롯 머신 적응기」란 책이 있다.우리가 '전통 슬롯 머신'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북촌슬롯 머신마을의 집들이 실은 의도된 정책의 산물이란 줄거리다. 그 정책을 짠 시기는 1960~1970년대다.조선시대 어느 시점의 양반가옥, 이른바 '기와집'이 '슬롯 머신'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이 슬롯 머신 정책의 문제는 슬롯 머신을 누구나 소유하기 어려운, 부자들만의 집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으로 굳어지는 바람에 현대 생활양식과 수준에 맞게 진화도, 발전도, 대중화도 못했다. 북촌슬롯 머신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골목, 가회동 31번지 일대 슬롯 머신들이 거의 전부 집이 아니라 별장, 호텔, 스튜디오란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 책에 바탕을 두고 북촌슬롯 머신마을 등 이곳저곳을 살펴본 내용을 얼마 전 '한복이 대체 뭔데'란로 풀었다. 이런 걸쓰다 보니 좀 난데없지만 '슬롯 머신'이 아닌 '한복' 생각이 났다.언젠가부터 경복궁 근처를 지나면서 눈살을 찌푸리곤 했던 기억이 진해서다. 관광객들이 입고 활보하는 저 옷, 대체 저것이 슬롯 머신이란 말인가? 저런 조잡한 옷을 도저히 슬롯 머신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고, 관광객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슬롯 머신이라고 받아들일 게 싫었다.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곳은 이런 거나 바로잡지, 대체 뭐하는 걸까.

슬롯 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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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처 상점에서 '슬롯 머신'을 빌려 입고 다니는 관광객들. ⓒ허남설

그런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북촌슬롯 머신마을의 슬롯 머신. 아마 대부분 사람들에겐 그 슬롯 머신에 대한 어떤 상이 있을 것이다. 담장, 대문, 마당, 마루, 처마, 기와 등등 열이면 열 비슷하게 생긴 집을 떠올린다. 앞서 인용한 책 정기황의「슬롯 머신 적응기」에 따르면, 이 상은 일련의 조직적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가'옥'을 이리 고치고 저리 바꾸며 만든 결과가 아니다. '찍어낸다'는 비아냥을 듣는 아파트 평면조차 20~30년 사이에 변화했는데, 슬롯 머신은 좀처럼 변하지를 않는다.


그럼,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슬롯 머신'의 이미지란 대체 뭘까?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슬롯 머신 관련 글과 사진을 몇 개 보니, 과연 거기에 나온 슬롯 머신의 상은 내가 지닌 슬롯 머신의 상과 거의 일치한다. 그럼 나는 어디서 이 이미지를 얻게 됐을까? 학교 교과서에서? 사극 등 미디어에서? 사촌형의 결혼식에서? 박술녀의 디자인에서?

슬롯 머신ⓒ국가유산청 홈페이지

경복궁 근처 가게들이 관광객에게 빌려주는 '슬롯 머신'이란 게 조악한 옷임은 틀림없다. 금빛, 은빛으로 번쩍번쩍한 자수가 박힌 치마는 아무리 봐도 예쁘지 않다.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하지만,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복'이란 이렇게 저렇게 생긴, 혹은 이렇게 저렇게 생겨야 하는 옷이라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긴 하다. 심지어 사극에 나오는 의상, 한복도 다 다르다. 같은 여말선초를 다뤄도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에 나오는 의복이천차만별이다.한복 또한 슬롯 머신처럼 어느 시대의 의복으로 규정하는 과정이 있었던 걸까. 따져보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슬롯 머신이 내가 알던 그 슬롯 머신이 아니라면, 한복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저 못생긴 한복이 들끓는 도심 풍경에 좀 너그러워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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