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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생활 34년

“선생님, 돌아오시는 거예요?”


“저... 안 돌아가요.”


2007년, 딱 이맘때였다. 1년 병 휴직에 이어 복직을 하기로 한 11월! 그 한 달을 앞에 두고 나는 학교에 사직서를 냈다. 느낌으로 알았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학급의 한 바카라 토토가 내게 전화를 했다.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수화기 저 너머에서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난 기어코 울고 말았다. 그렇게 같이 울다가 전화를 끊었다.


천직이라 여기고 살았던 직업이었지만, 나는 거기에서 달리기를 멈추었다. 자주 아픈 몸이 싫었고, 잦은 병가 때마다 느끼는 죄의식이 싫었다. 아픈 내 몸과 마음을 좀 쉬어주고 싶었다. 어찌 보면 온전히 나만을 위한 최초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늘 내 결정에는 부모님이 계셨고, 어머님이 계셨고, 시댁 형제들이 있었고, 내 가족이 바카라 토토.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내 몸이 아픈 건, 내 마음이 아픈 건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나 바카라 토토. 누군가를 위해서, 또는 모두가 잘 되기 위해서, 나는 충직한 개처럼 그렇게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다. 그리고 너무나 젊은 20대 후반부터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살아왔던 것이다. 너무 힘들다고, 이제 더는 못 살겠다는 내면의 아우성을 무시한 채 살았던 참혹한 결과였다.


삶이 달라졌다. 못한다는 말도, 싫다는 말도 가끔 할 줄 알았고, 햇살 좋은 오전에 빨래를 널었으며, 정성껏 음식을 만들며 노래를 불렀다. 지쳐서 누워있던 아픈 바카라 토토의 모습을 자주 보고 자란 우리 삼 남매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그거면 되었다. 눈에 띄게 공부를 잘했던 우리 큰딸은 초등 교사였던 바카라 토토가 있었지만, 무늬만 바카라 토토였고 무늬만 교사였던 바카라 토토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스스로 공부를 하면서 꽤 힘들었다는 걸 나중에 말해서 알았다.


삼 남매는 다 자랐다. 큰딸은 대학원 졸업식 두 달 전에 취업이 되어 서울에서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고, 아들은 전역 병사들이 연락해서 만날 정도로 장교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막내딸도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고 있다. 차를 타고 가다가 하늘이 멋있다고 며칠 전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난 우리 삼 남매가 여행지에서나 일상에서 내게 사진을 보내주면 그렇게나 좋다. "바카라 토토, 알지? 내가 바카라 토토 사랑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결혼 34년 차, 한 남자를 만나면서 어마어마한 시댁을 만나, 몸 고생 마음고생을 어마어마하게 했다. 철부지 아가씨가 익고 익어서 많은 걸 품을 수 있는 중년 여인이 되었다. 얼마 전에 들었던 명상 영상에서 들었던 말이다.


"내 살아온 삶을 축복합니다."


나는 그 말에 울컥하고 말았다. 울컥하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애썼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해 감사했다고, 축복한다고 고백했다.


서로 응원한다고, 사랑한다는 카톡을 매일 주고받는 바카라 토토 부부,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싸우는(?) 바카라 토토 부부, 아직도 둘이 있으면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바카라 토토 두 사람! 이 정도면 결혼 34년, 잘 살아온 거 아닌가.



사진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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