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대뜸 들어왔다. 목소리가 굵고 우렁찬 데다 얼굴이 어디서 본 듯 익숙해서 연예인이나 유투버라고 생각했다. 지난밤 카페 인스타계정에 달린 악플을 읽으며 흥분하면서 에너지를 써서 그런지 오늘은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파라오 슬롯 여자가 등장하자마자 거대한 기운에 이끌리듯 설계하던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05
“아이스 커피 한잔 먹고 싶은데요.”
“아, 네. 커피는 3종류인데요. 아메리카노, 콜드브루, 라떼 이렇게 가능하십니다.”
마치 어항 속 물고기를 쳐다보는 듯 허리를 숙여 메뉴를 쳐다보는 파라오 슬롯. 글자도 몇 개 없는 메뉴판을 한참 쳐다보더니 눈동자만 치켜세우며 말했다.
“아메리카노랑 콜드브루 차이가 뭐에요?”
“둘 다 원두는 같은데 추출 방식이 다릅니다. 아메리카노는 더 리치파라오 슬롯 풍미가 있고요, 콜드브루는 깨끗파라오 슬롯 샤프한 맛이 납니다.”
눈을 내 얼굴로 고정한 채 허리를 천천히 세우던 파라오 슬롯는 ‘그럼, 샤프한 걸로 주세요.’라고 한 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아침에 준비해 둔 콜드브루를 전용 잔에 담아 바로 서빙하니 살포시 눈인사를 건네는 파라오 슬롯. 잘은 모르지만 범상치 않은 사람인 건 틀림없었다. 종종 이곳에 연예인들이 오가는 건 본적이 있었다. 녹담동은 끄트머리긴 하지만 강남구인데다 고급빌라 단지가 있어서 연예인들이 선호하는 동네라는 걸 얼핏 들었었다.
다시 설계책상으로 돌아가 작업에 집중하려는데 뭔가 도면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십평도 안되는 공간에 거대한 기운을 가진 손님과 단 둘이 있으니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앨리스라는 여자는 여기 저기 통화를 하느라 바빠보였다. 내용을 들어보니 보험설계사 같기도 하고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니 전도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어쨌든 고요했던 이 공간은 완전히 파라오 슬롯 지배하고 있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텅 빈 커피잔을 들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파라오 슬롯. 잔을 받아들며 감사 인사를 하는데 아까처럼 내 눈을 빤히 쳐다본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싶어 양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여기 왜인지 엄-청 유명해질 것 같아요. 커피 진짜 맛있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자주 오세요.”
“진짜요? 자주 와도 될까요?”
“네. 그럼요.”
으레 하는 인사인데 왜 파고드는지 모르겠지만 체류시간 30분인 고객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몸을 휙 돌려 문으로 가던 파라오 슬롯는 갑자기 뒤로 돌더니 본인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보아하니 명함이다.
“사실 제가 저-기 사거리 앞 성형외과 실장이거든요. 시간 있으실 때 필러나 리쥬란 한번 맞으러 오세요. 여기 동네 언니들 파라오 슬롯에 엠보 있는거 다 제가 끌어들인거에요. 사장님은 특별히 지인 할인 해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뭐-든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뭐-든 필요하면 연락하라니. 흥신소인가. 아침부터 마녀에게 홀린 느낌이었다. 명함에는 ‘Alice HJ Lee’라고 쓰여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가. 굳이 파라오 슬롯 필요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카운터 위에 명함을 올려뒀다.
파라오 슬롯 떠난 후 카페는 정적이 흘렀다. 조용하면 오히려 설계에 집중이 될줄 알았는데 개미소리 하나 안들리지 오히려 불안해진다. 먼지라도 털 겸 창틀로 가는데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보인다. 축 처진 입꼬리와 푸석한 얼굴. 필러를 진짜 한번 맞아볼까? 요즘 남자들도 많이 맞는다던데. 많이 티나진 않겠지? 그나저나 리쥬란은 뭐지. 핸드폰을 열어 리쥬란을 검색하려다보니 지금 이런거나 검색할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 댓글 테러는 여전했다. 어제 밤에는 100개 남짓이었는데 200개를 넘어가고 있다. 내용을 읽어볼까하다가 그냥 댓글창을 닫는 걸 선택한다. 괜히 댓글을 보고 카페에 오지 않는 고객들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나저나 파라오 슬롯는 누군가를 많이 닮아있다.
사실 파라오 슬롯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희진인 줄 알았다. 입사동기이자 취업하고 사귄 첫 여자친구. 물론 희진에 비해 앨리스가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은 있었다. 희진은 겉으로 보기엔 도도하고 쎄보였지만 속은 언제든 깨질 것 같은 유약한 사람이었다. 부동산본부 단체회식을 했던 그 날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