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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무심했나

단편소설 <다시 봄이 오겠지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한동안 메시지만 주고 받았다. 그날 그 카페에서 록시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떠난 이후로, 나는 록시를 이날까지 만나지 못했다. 그날 그 카페에서 슬롯 꽁 머니와 나는 주로 걱정과 약간의 희망을 섞은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다 급피곤해져서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할때까지 내게도, 슬롯 꽁 머니에게도 록시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늘 그렇듯 록시가 사라진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거나 되새기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슬롯 꽁 머니와 나는 주말까지 록시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날 록시에게 끝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에게 증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주말부터 슬롯 꽁 머니는 대학교 선배, 동기들과 매주 모임을 가지느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록시는 더이상 직장동료가 아니므로 나와 그녀는 일상적인 연락을 주고받지 않게 됐다.


-언니.


수요일이나 목요일 쯤, 대략적인 주말의 바쁨을 미리 통보하던 슬롯 꽁 머니가 삼주차에는 월요일부터 스포일러 없는 문자를 보내왔다. 문자로 이야기를 계속할지 만나야할지는 그녀의 다음 대사를 얼마나 이끌어내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았다.


-뭐야, 뜸들이지 말고 말해.

-오늘 저녁약속 있어요?

-없어요. 회사 근처로 오세요.

-그럼 저 6시까지 갈게요.


역시 슬롯 꽁 머니의 용건은 문자나 전화를 초월한 무게나 분량을 가졌던 것이다. 그땐 이렇게 목적을 알 수 없는 소환에도 호기심이 적정선에 있었을까? 그 무렵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친한데 약간 부적절한, 또는 사무적이지만 지나치게 간섭하는 회사 사람들의 연락을 받고 나면 그 불길한 기운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리곤 했다. 차라리 해고를 암시하는 호출을 받는 것이 나을 정도로 애매한데 더 불길한 그런 호출이 어느 시점에 몰려있었다.


그 이후로 모르는 번호는 물론이고 아는 번호로 전화가 와도 불쾌한 사생활 침해로 느껴졌다. 전화기는 날이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점점 더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갔는데 정작 전화기의 첫번째 존재 이유인 '전화'는 점점 쓰고 싶지 않은 기능이 되어갔다.




슬롯 꽁 머니에게는 내가 전화를 걸면 걸었지, 내 전화를 받지 못했을 때를 제외하면 먼저 전화가 온 적은 없었다. 그땐 몰랐지만 이미 우리-적어도 나-와 헤어진 록시는, 함께 있다가 슬롯 꽁 머니의 연락을 받거나, 내가 대표로 슬롯 꽁 머니에게 연락했기 때문에 슬롯 꽁 머니에게 직접 연락한 적이 거의 없었다.


슬롯 꽁 머니;언니!슬롯 꽁 머니;


약속을 거의 잊을뻔한 상태로 퇴근하고 나오는데 회사와 전철역 사이에서 슬롯 꽁 머니가 나타났다.


슬롯 꽁 머니;어디서 나타난거야?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나 조오기 새로생긴 카페 구경하다가.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밥 먹어야지.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응, 그래서 구경만하고 도로 나왔어.슬롯 꽁 머니;


우리는 돈가스 집에 자리를 잡고 안심가스 두 개를 주문했다. 슬롯 꽁 머니는 수저를 놓고 물을 따라준 뒤 코트를 벗어서 빈 의자에 부려놓았다.


슬롯 꽁 머니;언니. 록시언니랑 연락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아니? 우리는 거의 만나서만 얘기하지.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나는 거의 언니한테 문자하잖아. 그런데 이제 언니들이 같이 있는게 아니니까, 안부차 연락해봤거든.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그러게,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의 말을 듣고보니 내가 너무 무심했나, 하면서도 평소에 록시와 주고받은 문자를 떠올려보면 '커피 뭐 시켜?'같은 정말 기능적인 메시지밖에 없었고, 그래서 두어번 안부 연락을 하려다 관두었던 기억이 났다.


슬롯 꽁 머니;언니는 전 직장동료니까 알게 모르게 심리적인 문턱이 있었을거야.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너 벌써 심리학 듣냐? 왜케 말을 잘 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아니, 안 들어. 근데 록시언니가 다음주에 만나자고 하는데 왠지 느낌이 이상했어.슬롯 꽁 머니;


그러고 보면 항상 슬롯 꽁 머니가 몇시까지 갈게요, 언니들 몇시에 봐요, 언니들 이따 봐요, 이런 식으로 주로 나에게 연락을 해서 록시는 자연스럽게 동행했었다. 늦게 만날때는 내가 다른 약속이 있어서 록시와 슬롯 꽁 머니가 먼저 만나거나, 각자 볼일을 보고 클럽 근처에서 만나는데 그때도 각자 슬롯 꽁 머니에게만 연락을 하고 모였다. 회사에서 함께한 시간을 생각하면 록시와 나의 조합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만, 회사 밖에서 록시와 내가 단 둘이 있었던 적은 슬롯 꽁 머니가 자고 있을 때와 슬롯 꽁 머니가 화장실에 갔을 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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