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희망 (Maid)’, 슬롯 꽁 머니 사이클
<누워서 쓰는 글
매거진 제목대로 나는 글을 침대에 누워서 쓴다. 엄지로 누워서 쓰는 글이다. 밤 11시, 노트북을 다시 열고 글을 쓰기엔 나는 너무 지친 직장인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매거진에 쓰는 글은 내가 누워있을 때 스마트폰으로 쓰는 글이다.
글을 안 쓴지 120일이 넘었다고 브런치가 빚쟁이처럼 글쓰라고 독촉한다. 그러다가 고단한 인생 때문에 글쓰기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한, 가정 슬롯 꽁 머니 때문에 날개가 꺾인 스물 다섯살 알렉스 이야기를 넷플릭스에서 봤다.
줄거리는 네이버, 구글에 잘 나와있을테니 생략. 알렉스는 가정 슬롯 꽁 머니 피해자다. 가정 슬롯 꽁 머니은 정의는 폭넓어야 한다. 가족인 가해자가 물리적 슬롯 꽁 머니을 가해야만 가정 슬롯 꽁 머니이 아니다. 얼굴에 멍이 들지 않아도, 가슴에 멍이 들게 하면 그것은 슬롯 꽁 머니이다. 영어로는 emotional violence. 감정적 슬롯 꽁 머니. 알렉스는 감정적 슬롯 꽁 머니 피해자다. 알렉스의 파트너인 션은 술을 마시면 벽을 치거나 그릇을 던지고 알렉스 주변 물건을 부수는 식으로 슬롯 꽁 머니을 휘두른다.
언제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다가 알렉스는 딸 메디를 데리고 도망쳤지만 처음에 그는 자신이 가정슬롯 꽁 머니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정슬롯 꽁 머니 피해자 쉼터로 가라고 권하는 사회복지사를 보고 “거기엔 ‘진짜’ 가정 슬롯 꽁 머니 피해자가 가야지 내가 그들의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선을 긋는다. 그때 시니컬한 사회복지사는 “진짜 가정 슬롯 꽁 머니 피해자?”라고 되물으며 알렉스에게 리플렛을 하나 권한다. 가정 슬롯 꽁 머니이 뭔지 다시 공부하라는 뜻이다.
어쩌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해외 여성 정책을 3년 넘게 조사하면서 배운게 있다. 영국에서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의 절반 이상이 남편이나 연인에게 목숨을 잃었다. 기사 참고: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51354.html가장 가까운 사이가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는 아이러니다. 그리고 영국은 가정슬롯 꽁 머니 정의를 폭넓게 본다.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교묘한 경제적, 심리적 통제도 가정 폭력으로 본다. 드라마에서 션이 딱 그랬다. 알렉스가 돈이 없어 폰요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니가 왜 폰이 필요해? 전화 올 때도 없잖아. 내 폰 같이 써”라고 통제하고, 알렉스에게 “경제 관념이 없다”고 신용카드를 주지 않고 (경제권 압수), 알렉스 친구가 빌려준 차도 “꼴보기 싫다”며 자기 맘대로 반납해 알렉스의 이동권을 제한했다. 이 숨막히는 삶이 바로 가정 폭력이다.
이 드라마가 좋았던 것은 이 애매한 가정 슬롯 꽁 머니 경계를 다루고 있어서다. 션에게 맞은 적이 없어서 자신은 가정 폭력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던 알렉스처럼,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의 가정 폭력 관련 법이 딱 이 정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알렉스가 피해자 쉼터에 머무를 때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된 대니얼은 목을 졸라 죽이려 했던 남편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쉼터 사회복지사 데니스도 대니얼이 남편에게 돌아간게 벌써 “세번째”라고 했을 때 알렉스는 놀란다. 대니스도 폭력적인 남편을 떠나는데 “다섯번의 시도”가 필요했다고 한다.
가정 슬롯 꽁 머니 사이클. 피해자들이 폭력적인 파트너에게 돌아가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100퍼센트 악인인 가해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션은 다정하고 책임감 강한 모습과 폭력적이고 통제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다. 알렉스의 엄마가 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두 발벗고 나서 돕고, 션의 책임감 있는 모습과 갈 곳 없는 자기 처지 때문에 알렉스는 다시 션의 집으로 돌아가고, 또 슬롯 꽁 머니 사이클이 반복된다. 그리고 다시 빈손으로 매디를 안고 도망쳐 피해자 쉼터를 두드린다. 두번째 탈출이다. 대니얼이 자신을 죽이려한 남편에게 돌아갔을 때 고개를 저었던 알렉스가 똑같은 사이클을 반복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알렉스는 복이 많다. 1) 젊고 2) 건강하고 3) 글쓰기 재능이 있고 4) 주변에 조력자가 많아 슬롯 꽁 머니 사이클을 벗어나고 양육권을 쟁취해 새 삶을 산다. 그것은 알렉스가 가진 끈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방법을 찾으려는 그의 생활력,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보듬을 줄 아는 삶의 자세 때문일 것이다. 물론 드라마 중간 중간 잘못된 선택으로 내 분통을 터지게 하고, 제4화에서 레지나 집을 청소한 뒤 욕조에서 샤워하고, 틴더로 낯선 남자를 불러서 자기집 행세를 할 때는 드라마를 여기서 멈춰버리려고 했었다. 도덕적인 척하던 알렉스가 직업 의식을 저버리는 것이 이해가 안돼서였다. 간땡이가 얼마나 부었으면 남의 집에 모르는 남자를 초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이 드라마를 끝내길 잘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가난한 싱글맘의 삶이 정말 내 마음을 저리게 했다. 알렉스가 노숙을 했을 때 몹쓸 일을 당하지 않은 것이 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작가가 최악의 상황으로 알렉스를 몰고가진 않아서 다행ㅋㅋ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많은 가정 폭력 피해자들이 슬롯 꽁 머니 사이클을 끊고 벗어날 수 있도록 사회가 바꼈으면 좋겠다.
덧붙임: 오늘 처음으로 침대에 누워서 글을 하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