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나 자신이 가장 작아보이는 날. 그 날은 내가 한없이 울적해 질 수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으레 나는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가상 바카라함인지 출처를 더듬어보곤 하는데, 예외없이 그 원인은 꼭 내 안에 담겨있다. 나는 태어나길 가상 바카라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인걸까? 끝없는 가상 바카라은 무력함으로 이어진다.
그러고 보면 나의 가상 바카라함은 줄곧 나에게서 비롯되어 왔다. 학창시절의 가상 바카라은 온통 성적과 교우관계에 비롯한 것이었다. 보다 심각한 이유가 없었던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별탈없이 유지하던 성적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발목을 잡았고, 교우관계 역시 생각지 못하던 곳에서 속을 썩였다. 돌아보면 그땐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온 세상이 불만이었고 나에게 등을 돌린 것만 같았다. ‘내 편이 하나라도 있긴 한 걸까?’ 가상 바카라함의 끝에서 끝내 나는 예민하고 짜증스러운 아이가 되어 있었다. 가상 바카라과 외로움은 상호보완적이니 관계라, 그것은 곧 나의 가장 큰 치부가 되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야자시간에 강의를 들었고, 문제를 풀었고, 정답을 맞추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열심히는 했지만 잘 하는 요령이 부족했던 것 같다. 잔인하지만 공부에도 선천적인 머리가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나에겐 선천적인 공부 머리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꼴에, 공부 잘하는 아이 타이틀은 놓기 싫었는지 외고라는 보기 좋은 포장지에 싸여 ‘공부 잘하는 아이’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22살, 편입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 연이었던 입시 실패는 나의 가상 바카라의 오랜 원천이 되었다. 그전까진 대학에 들어가면 다 좋아질 거란 막연한 희망에 몸을 기댈수야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조차도 먼 꿈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가상 바카라한 감정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선택했던 것들은 자기 합리화였다.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어’라던지, ‘이까짓 거 안해도 그만’이라던지, 그럴싸한 핑계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뻔뻔스럽게 말이다. 자기합리화는 순간적으로 가상 바카라한 감정을 삭히는데 효과적이였다. 이따위 것들에 가상 바카라해 했던 내가 미워서라도 스스로를 다그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중엔, 이따위 변명을 늘어놓을 줄만 아는 나 자신이 치졸해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더욱 더 깊은 가상 바카라이 찾아왔다.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줄 모를 만큼 낯설고 괴로웠다.
가상 바카라함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악한 감정이다. 마주하면 할수록 내 안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나는 나를 제대로 들여다 볼 줄 몰랐다. 나는 그저 이 가상 바카라함이라는 감정에 갇혀 평생 기생해야 하는 것일까? 못되고 못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이러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제어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이러한 가상 바카라도 나라는 사람의 징그러운 습성임을 이해한다. 이런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서 누구보다 잘 해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그래야만 만족할 줄 아는 이놈의 자기애가 나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것도.
가상 바카라은 아주 강력해서 잠깐의 여파로도 아주 손쉽게 정신과 육체를 잡아 비튼다. 짧게는 몇 시간을, 길게는 몇 달을 괴롭히니까. 영원히 떼어낼 수 없다면 그 감정이 감성이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보듬어 주어야겠다는 게 지금의 결론이다. 나 조차도 포기한다면 내 인생이 너무나 슬퍼지니까. 가상 바카라해질 때마다 예전처럼 손을 놓아버리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